한줄 詩

잠들지 못한 것들이여 안녕 - 김태형

마루안 2018. 8. 1. 19:27



잠들지 못한 것들이여 안녕 - 김태형



슬픈 것들만 비 맞고 섰구나 맨 처음 굵은 빗물에 씻겨 가는
저녁의 길들은 수척한 허리를 꺾어 또 길을 낼 것이다
비 맞고 섰는 허름한 꽃집 앞 화초들이나
바래진 기와를 얹은 불 꺼진 가옥들 가까이 저 가로등 불빛에 기댄
빗방울의 기둥을 안고 돌아오는 내 늦은 밤길의 귀가
나 꺼칠하니 어둠 속 비춰지는 한낱 더러워질 슬픔과 함께
날이 새도록 집에를 걸어 간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하였구나
웅성거리다가 흐느끼다가 하면서 이처럼 나 애처로이
거리의 어둔 불빛 한점 무거운 발걸음에 치이는 서툰 노래들
얼마나 슬펐던 것이냐 그렇게 무턱무턱 자라나는 생각들은
주체할 수 없이 막무가내 나만의 목소리를 잡아내느라
내 곁에 있을 쓸쓸함을 바작바작 타 들어간 담배 연기 속에 날려 버렸구나
아껴 둔 첫사랑의 아련한 얼굴만 절실히도 찾아갔구나
간혹 세상의 어느 구석 눈이 부어오르도록
잠들지 못할 격정에 사로잡혀 나 언제 그리도 쏘다녔더냐
여기는 내가 살던 곳 또 여기는 내 취중
멀리도 걸어 와 쓰러져 엎어지던 곳 그래, 나 한때의 추억 속에서
끝내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잃어 버린 것이었음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차마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었음을
나 그 어둡게 달아나던 이름의 마디마디를 큰 소리로 더는 부르지 않겠다
뒤늦은 밤길 나 이제야 집에를 걸어간다
너무 젖지 않게 내 몸에 스미는 빗방울 빗방울들
내 곁에 다가설 어느 이의 쓸쓸함을 느끼듯 내 안에 비춰지는 그들
잠들지 못해 서성이던 걸음도 비로소 흘러 내리는 따뜻한 눈물도
이 빗속에 저마다 하나씩 작은 불빛을 달아 둘 줄 아는구나



*시집, 로큰롤 헤븐, 민음사








추억에 부침 - 김태형



생각난다 잘못 쓴 글자를 지우고 지우고 할 때마다 떠오르는
오랜만에 써 보는 한 소식 예전 같지 않아 낯설고 어눌해
자꾸만 틀리게 쓰는 동안 생각은 물방울처럼 군데군데 맺혀 있다
손목의 힘이 뻑뻑하게 밀어 내는 이 흰 종이 위로
결국 형편없이 구겨져 나갈 지금 이 소식은 불편하다
물방울을 들여다보면 그곳에 되비쳐 올 눈빛은 있는가
소식은 접어 두기로 한다 한 해의 마지막을
종일 켜 놓은 라디오에서 정확히 시보를 알려 온다
한 권의 노트를 두툼히 묶어 두고 이제 무엇을 기록할 것인지
새로 쓰는 문장들은 고집스럽게 빈 틈을 만든다
그러나 생각나지 않는다 애써 지우려 했던 기억들은 끝내 지워지고
그때 그 길목의 남자는 흐트러진 외투를 걸치고 있었던가
두고 온 것은 많지만 결코 가져 갈 것은 많지 않았던 시절
그로부터 오 년이 지나고 소식을 끊은 지 사 년이 지나 버렸다
낮은 상점들은 희미한 듯 한때 남루하고 따뜻했었지만
길을 넓히고 많은 차량들이 종일 쉴 새 없이 지나치는 지금
여전히 비좁아도 변할 것 같지 않았던 기억처럼 쓸쓸하다
온전히 돌려보내지 못한 마음만 홀로 어둑어둑 저물어서
빈 틈 많은 문장도 결국은 아프게 지워져 가는 추억일 뿐
눈물 자국처럼 잊으려 하고 또 이렇게 희미해져 가지만
버려질 것을 알면서도 잘못 쓴 글자를 고치던 고집스러움은
회한을 만들고 부칠 수 없는 한 소식 먼 세월로 보내려 한다
낡은 외투처럼 한 남자를 쓸쓸히 저녁 길목에 버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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