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별의 주소는 묻지 않겠다 - 김남권

별의 주소는 묻지 않겠다 - 김남권 늦은 그리움에, 너는 첫눈에 반한 첫눈처럼 내 가슴에 들어와 별이 되었다 우편번호도 없이 캄캄한 우표 한 장 붙인 채 수억 광년을 걸어서 왔다 아주 오래전 보았던 눈빛 무늬를 기억해 내고는 연극이 끝난 배우처럼 나에게 왔다 하루에 한 번씩 지상의 별이 길을 떠나면 멀리서 마중 나온 너는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 차가운 몸을 녹였다 아직 하늘이 녹기 전, 푸른 수의를 입고 먼저 오는 이의 조문을 받기 위해 지상에 별 하나를 밝히고 그 입술 위에 천상의 화인을 찍었다 숨이 막혔다 그렇게 혈관에 새긴 편지로 바람의 온도를 재는 동안 어둠이 걷혔다 아직 나는 너에게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다만 새벽이 올 때까지 멀리서 오는 별 하나를 그리워할 뿐이다 *시집, 발신인이 없는 눈..

한줄 詩 2019.11.27

산벚나무 연서 - 김영언

산벚나무 연서 - 김영언 너무, 겨울은 길었습니다 미처, 바라보지도 않았던 먼발치 능선 계절이 남기고 간 누더기 자락 꽤나 칙칙하게 덮여 있던 기억이 한껏 지루해질 대로 지루해질 무렵 문득, 점점이 찍힌 수채 물감처럼 연분홍 미소 헤프게 흘러내리길래 무작정 마음이 하얗게 흘려서 연둣빛 산길을 이끌고 그대에게 가는 길 드디어, 그대 무릎께에 이르러 숨차게 올려다본, 아 푸른 하늘 가득 복받쳐 오르는 무언의 빛살 조각들 눈부셨으나 그대, 첫 꽃은 너무 급해서 미처 마음에 따 담을 틈도 없이 봄비 한 번 제대로 적셔볼 틈도 없이 단 한 번의 도도한 破顔大笑 끝에 엷디엷은 색 서둘러 버리더이다 너무, 올봄은 짧았습니다 *시집, 집 없는 시대의 자화상, 작은숲출판사 단풍나무 아래 내려놓은 마음 - 김영언 단풍나무..

한줄 詩 2019.11.23

독 - 전형철

독 - 전형철 독이 사라졌다 파스를 떼어 낸 자국만 남았다 한 해를 채 못 채우고 이사하던 날 장독인지 쌀독인지를 놓고 왔다 가보(家寶)는 아니지만 낡은 수건 걸레 삼듯 재활용할 수도 없지만 집에 남은 가장 오래된 바닥이었다 사소한 소문들이 집 문 앞을 서성거리고 빠지거나 버리거나 두고 온 것이 독만은 아니었는데 골목과 대문의 경계에 걸터앉아 그늘의 나이를 생각했다 달을 맞이했다 독을 찾을 수 없었다 앳 애인의 집을 맴돌 듯 심장을 도둑맞은 독이 없는 하루 하늘을 오래 지고 누운 봉분 주인의 감정이었다 독이 있었다 *시집, 고요가 아니다, 천년의시작 덫 - 전형철 오늘 묵혀 둔 병이 당당히 생의 한 켠을 결딴낸다 비문을 파다 돌쩌귀가 떨어져 내리고 발바닥에 핏줄이 서고 딱 그만큼 내가 선 자리가 서서히 ..

한줄 詩 2019.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