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독 - 전형철

마루안 2019. 11. 22. 21:59

 

 

독 - 전형철


독이 사라졌다
파스를 떼어 낸 자국만 남았다

한 해를 채 못 채우고 이사하던 날
장독인지 쌀독인지를 놓고 왔다
가보(家寶)는 아니지만
낡은 수건 걸레 삼듯 재활용할 수도 없지만
집에 남은 가장 오래된
바닥이었다

 

사소한 소문들이 집 문 앞을 서성거리고
빠지거나 버리거나 두고 온 것이
독만은 아니었는데
골목과 대문의 경계에 걸터앉아
그늘의 나이를 생각했다
달을 맞이했다

독을 찾을 수 없었다
앳 애인의 집을 맴돌 듯
심장을 도둑맞은
독이 없는 하루
하늘을 오래 지고 누운
봉분 주인의 감정이었다

독이 있었다


*시집, 고요가 아니다, 천년의시작


 

 

 

 

덫 - 전형철


오늘 묵혀 둔 병이
당당히 생의 한 켠을 결딴낸다
비문을 파다 돌쩌귀가 떨어져 내리고
발바닥에 핏줄이 서고

딱 그만큼 내가 선 자리가
서서히 중심으로 깊어지는
딱 그만큼만

풀을 보며 생장점의 위치를 짚듯
천칭 저울의 정지를 점 찍어 두듯

명징한 공리(公理) 있다면 그것은 내가 걸어온 발자국

 

불개미처럼 당신의 입가를 맴돌다 붉은 물집으로 남았거나
지렁이처럼 축축한 바짓단을 끌며 비 내린 골목을 걸었거나
문장과 마음 사이를 사포질하던 모래 폭풍이 썩은 이빨이었거나

 

 

 

 

# 독이라는 시를 읽으며 제목을 毒으로 생각했다. 이 시인의 시가 유독 쓸쓸해서 가슴을 서늘하게 쓸어내린 탓이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毒으로 읽힌다. 유목민의 나라 몽골에서 최고의 욕은 '평생 한군데서만 살아라'라고 한다. 바람처럼 떠돌 팔자인 나에게도 견딜 수 없는 욕이다. 파스를 떼어 낸 것처럼 毒을 담은 단지 자국이 내 가슴에 박혔다. 시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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