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왼손의 그늘 - 우대식

마루안 2019. 11. 26. 22:32



왼손의 그늘 - 우대식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시라
이 가을날 나의 사랑을
얼마 남지 않은 저 잔광의 빛으로
당신을 몰고 가는 일
그것이 내 연애법이다
그 몰입에 얼마나 당신이 괴로워했을 줄
모든 빛이 꺼지고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처럼
당신과 내가 어느 풀밭에 앉아 있다 하자
젓가락을 들어 당신은 내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음식 밑에 바쳐진 당신의 왼손
그 아래로 그늘이 진다
왼손의 그늘,
지상에서 내 삶이란
당신이 만들어준 왼손의 그늘에서 놀다 가는 일
놀다가 가끔 당신이 그리워 우는 일
코스모스처럼 내 등을 툭 한번 쳐보다가
돌아가는 당신의 늦은 귀가
그림자가 사라질 때
나의 연애는
파탄의 골목길
용재 오닐의 비올라 소리 같은 깊고 슬픈
당신의 오랜 귀가



*시집, 설산 국경, 중앙북스








먼 날 - 우대식



화롯불에 호박 된장국이 뉘엿뉘엿
졸아가던 겨울밤
육백을 치다가
짧게 썬 파와 깨소금을 얹은 간장에
창포묵을 찍어 먹던 어른들 옆에서
찢어낸 일력(日曆) 뒷장에
한글을 열심히 썼던 먼 날
토방 쪽 창호문을 툭툭 치던
눈이 내리면
이젠 없는 먼 어머니는
고무신에 내린 눈을 털어
마루에 얹어놓고
어둠과 흰 눈 아래를 돌돌 흐르던
얼지 않은 물소리 몇,
이제 돌아오지 않는 먼 밤
돌아갈 귀(歸) 한 글자를 생각하면
내 돌아갈 곳이
겨울밤 창호문 열린 토방 한구석임을
선뜻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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