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을 나눈 직후 - 황학주

마루안 2019. 11. 23. 19:38



사랑을 나눈 직후 - 황학주



그날 늦은 밤은 서랍을 빼다 둔 듯이
별들 사이에 걸리고
마침맞게 내 손엔 당신의 묵주반지가
쥐어져 있었다


갈참나무가 있고
감기는 눈들이
나무 범위 안에 달려 있었다


오일육 도로 숲 터널을 지날 때까지
왼쪽 허리 밑에 담요를 받치고 있는 뜻을 몰랐고


몰랐다면 나중에 어긋난 뼈가 악기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뜻이다


그날부터 옆으로 안는 법을 고안
서로의 어깻죽지가 되는, 우리 사이에 이는 비밀의 서랍을 가지게 된다


사랑을 나눈 직후
비틀어진 골반에 늦은 단풍이 달렸다


그럴까요, 감전 뒤에 온 정전
마른 등의 낙수받이 밑에 있던 뼈인지만 더듬어보지요



*시집,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문학동네








다시 그걸 뭐라고 불러 - 황학주



누가 저렇게 해풍을 응대하며 살아가지


꽃이 되었으나
꽃으로 될 수 있는 게 뭘까, 묻는다면
그야 바람도 제 의지로 다니는 것만은 아니라고 달래주리요만


작아서 기억되는 꽃 중에서 신부를 삼고 싶은 걸
울대를 조이며 두리번대는
해국 점자들은 또다시 이곳에 피어나지
한줌 흙을 돌 겉에 토해


숙여서 해줄 수 있는
형태이면
두 손으로 책을 펴거나 꽃을 심는, 맞절이 좋을 것 같다
이런 풍토에서
나는 몇 평 안 되는 소원으로 예식을 올리는 것이니


점점이 명치 주위에 박아보는
연한 마음의 자줏빛 봉지들


영혼의 금빛 목조 처마 위에 하나둘 떠오르는
너를 어떻게 버려, 그걸 뭐라고 불러


해국인데
바람 같은 자의 밑자락을 거머쥐는 종류인데






# 황학주 시인은 1954년 광주 출생으로 광주상고, 세종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사람>,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 <갈 수 없는 쓸쓸함>.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 <너무나 얇은 生의 담요>. <루시>. <저녁의 연인들>. <노랑꼬리 연>, <某月某日의 별자리>.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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