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부터 겨울이 온다 - 이윤훈
등부터 겨울이 온다
반쯤 열린 뒷문의 귀가
마른 풀 살랑이는 산그늘 쪽으로 기울고
웅덩이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다
그대의 등이 설핏 보였을 때 그곳이
그대의 속울음이 고였던 자리라는 걸
나의 벽지라는 걸
시린 등으로 알았다
그대 없어 등이 더 어둡고 시리다
뒷문 곁 강아지 등에 손을 얹는다
앞산 뒤켠으로 아직 남은 빛이 환하다
한때 비겁하게 비수를 감춘 적이 있다
내 등에 통증이 왔다
내 등이 얼마나 가파른지
지나는 바람이 일러주었다
가끔 내 등에서 벌레 먹은 가랑잎이 서걱인다
이제 쓸쓸한 등으로 나를 다 보이고 싶다
서글픈 일로 서글프고 싶다
어둠이 오고 저마다 제 깊은 곳으로 들어선다
군불을 지펴 지붕 위로 순한 연기를 피워 올려야겠다
겨우내 그대의 등에 곤히 등을 대야겠다
*시집, 생의 볼륨을 높여요, 문학의전당
황천반점(黃泉飯店)에서 - 이윤훈
누구나 홀로 죽음과 길 떠나는 세상
얼키설키 뒤얽혀 지지고 볶고 산다
비굴 한 접시와 치욕 한 접시로
하루치의 치사량을 견디며
굽은 숟가락으로 하루씩 목숨을 퍼먹는다
무릉도원을 찾아 헤매다
삼거리 갈림길 가 황천반점에 몸을 부린다
마당 한복판 늙은 나무 아래
젖을 물리는 어미개가 얼마나 혀로 핥았나
밥그릇에 빛이 난다
나직한 지붕 아래
불처럼 뜨겁게 소리치며 지지고 볶는 부부
서리서리 얽힌 면 한 접시 뚝딱 내와 내 몸을 모신다
볶은 면 한 접시, 산 자의 한 끼
깨끗이 비운다
세상 한 귀퉁이 황천반점
저승길 마지막 식사 다시 예 와 들고 싶다
# 이윤훈 시인은 1960년 경기도 평택 출생으로 아주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생의 볼륨을 높여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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