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벚나무 연서 - 김영언
너무,
겨울은 길었습니다
미처,
바라보지도 않았던 먼발치 능선
계절이 남기고 간 누더기 자락
꽤나 칙칙하게 덮여 있던 기억이
한껏 지루해질 대로 지루해질 무렵
문득,
점점이 찍힌 수채 물감처럼
연분홍 미소 헤프게 흘러내리길래
무작정 마음이 하얗게 흘려서
연둣빛 산길을 이끌고 그대에게 가는 길
드디어,
그대 무릎께에 이르러
숨차게 올려다본, 아
푸른 하늘 가득 복받쳐 오르는
무언의 빛살 조각들 눈부셨으나
그대,
첫 꽃은 너무 급해서
미처 마음에 따 담을 틈도 없이
봄비 한 번 제대로 적셔볼 틈도 없이
단 한 번의 도도한 破顔大笑 끝에
엷디엷은 색 서둘러 버리더이다
너무,
올봄은 짧았습니다
*시집, 집 없는 시대의 자화상, 작은숲출판사
단풍나무 아래 내려놓은 마음 - 김영언
단풍나무 아래 마음을 내려놓고
휘청거리며 떠나네
겨울이 오고
함박눈 속에 서서 외롭게 얼어갈 때
다가올 발자국 설령 없더라도
마음 녹지 않아 한 생애가 춥더라도
거짓말처럼 봄이 오고
지난 생이 녹아내리는 소리
벚나무 가지 끝에 피어 눈부실 수만 있다면
다음 생의 가을 다시 붉고 붉어서
그대 다가올 수만 있다면,
그대 발등에 언 마음을 내려놓고
빈 길 떠나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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