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그대 어느 계단쯤에서 - 부정일

그대 어느 계단쯤에서 - 부정일 요람에서 무덤까지 계단이 놓여있다 치자 그대, 갈 길이 먼 양 어느 계단쯤에서 쉬고 있는지 스무 계단 옆길에 핀 꽃이 예뻐라 서른 계단 옆 골목에 주점도 많더라 꽃밭, 주막 다 들러 사십 계단 오르니 휘청, 약간은 숨이 차더라 뒤돌아보며 한 번쯤 앞에 간 자 뒷모습 보며 오십 계단 오르니 바람이 불더라 멀리 하얗게 출렁이는 억새 들녘 아스라이 그 너머 무엇이 있는지 어쩌면 붉은 노을 함께 그대, 그 너머에서 쉬고 있는지 *시집, 허공에 투망하다, 한그루 이순의 길목 - 부정일 딸아이와 아들을 아내가 키웠다, 나는 엎에 있었을 뿐 분명, 선생님이 부르면 내가 갔었는데 앨범 속에나 색 바랜 흔적 있을까 다 커버린 애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은 흔적들을 가두어 버렸다 망각 속에는..

한줄 詩 2019.12.01

칼새의 행로 - 천융희

칼새의 행로 - 천융희 착지를 모른 채 악천후에도 비상착륙을 잊은 듯 익숙한 기류에 전속력으로 내리꽂는 칼새의 부리를 본 적 있다 시작점과 도착점이 일치하는 행로는 오늘의 표정 때론 온몸을 파묻어 쌓아 올린 패지 더미만 기우뚱 길을 트는데 경로추적이 필요 없는 그를 좁은 골목을 여닫으며 쉴 새 없이 비행하는 그를 시장 사람들은 칼새라 손짓한다 먹이가 포착되면 그의 활강은 매우 민첩하다 패지가 던져지는 끝점마다 어김없이 발견되는 깃털들 생계로 구성진 바닥은 칼새의 일생 후퇴할 수 없는 요새이자 최전방이다 일몰 무렵 은행나무 아래 고도를 낮춘 쪽잠의 늙은 사내 깔고 앉은 그림자마저 노래지는 시간 농익은 은행알 툭, 바닥을 구를 적마다 희번덕거리는 깃털을 곤두세워 바람의 방향을 조절하는 저 홀로 쫓고 쫓기며 ..

한줄 詩 2019.11.30

아름다운 날 - 육근상

아름다운 날 - 육근상 내가 입고 있는 이 고동색 윗도리는 비정규직 아들이 아끼고 아낀 월급 쪼개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다 내가 이 추운 날 밖으로만 떠돌아도 한 끼 굶지 않는 아름다운 이유다 내가 입고 있는 이 푸른색 바지는 여름휴가 때 각시가 겨울옷은 여름에 사놔야 한다며 중앙시장 누비 집에서 간신히 이천 원 깎아 사준 것이다 내 이 추운 날 밖으로만 떠돌아도 몸 따끈히 데울 수 있는 한 잔 술이 곁에 있는 아름다운 이유다 내가 입고 있는 이 베이지색 도꾸리는 하나 밖에 없는 딸네미가 가으내 백열등 아래 앉아 기러기 울음 한 올 한 올 엮어 선물로 준 것인데 아무리 취해 기역자를 걸어도 다른 곳 가지 않고 집으로 찾아가는 아름다운 이유다 겨우내 들고 다니던 촛불 아직 꺼지지 않고 문간 매달아 놓은 지..

한줄 詩 2019.11.28

바람 부는 날 세상 끝에 와서 - 최성수

바람 부는 날 세상 끝에 와서 - 최성수 장작을 열 개쯤 아궁이에 넣고 캄캄한 방 안에 눕는다 봉창문 밖으로는 밤새도록 바람이 분다 바람은 때로 호리병 속을 빠져나가며 높은음을 내다가 갑자기 여러 사람이 두런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사랑을 잃고 홀로 흐느끼는 여인의 울음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나뭇잎으로 창호지를 후려 패다가 천지 사방 고립무원의 적막한 순간을 보여주려는 듯 딱 멈추기도 하며 산마을의 밤은 점점 깊어간다 절절 끓는 방바닥에 온몸을 지져가며 나는 백석을 생각하다가 유배지 초막에 남은 약전을 떠올린다 설핏 잠들었다가 바람 소리에 다시 깨어나 빈 어둠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하며, 꿈도 아니고 꿈같기도 한 시간이 흐른 뒤 세상을 잊어버리려 짐짓 온몸의 맥을 풀어놓고 만다 삶이란 가을 잎, 그 잎..

한줄 詩 2019.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