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환송 - 서상만 가을 환송 - 서상만 차라리 내년에는 맨몸으로 오시게 이렇게 너를 빈 몸으로 보낼 양이면 별빛 가득한 밤하늘 풀벌레 소리랑 가ㄹ 가ㄹ 그 이름조차 묻을 데가 없어 네가 앉은 곳마다 서리꽃 피고 눈앞의 벼랑에선 선들바람 일어 동토라도 곧 떠나지 않으면 죽음이 될 것 같은 비의만 남.. 한줄 詩 2019.11.22
가을엔 부자 - 최서림 가을엔 부자 - 최서림 저렇게 남아도는 햇살만 한 상품이 있을까. 저 부부가 소쿠리에다 주워 담는 낙엽만 한 인테리어가 있을까. 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만큼 부드럽게 파고드는 기교가 있을까. 저 느티나무 잔가지보다 더 충만하게 하늘을 끌어안고 있는 게 있을까. 텅 비어서 깊은 하.. 한줄 詩 2019.11.21
미친 척 - 한관식 미친 척 - 한관식 덜렁거리는 팔을 쥐고 응급실에 누웠다 순하게 생긴 간호사가 피범벅 된 옷을 가위로 잘랐다 가위는 몇 번 잰걸음을 하더니 마침내 속살을 보여줬다 살점과 피가 엉클어진 자리에 두 동강 난 팔과 손이 드러났다 간호사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애써 웃었다 그녀의 눈엔 .. 한줄 詩 2019.11.21
너무 느리게 와서 너무 빨리 떠나는 - 김종필 너무 느리게 와서 너무 빨리 떠나는 - 김종필 아쉬운 가을의 인식표처럼 달랑거리는 샛노랗거나 붉은 한 잎 샛길 같은 가을을 지나는 걸음마다 칼바람에 쓰러져 간 무수한 잎의 마른 주검이 밟히고 앙상한 잔가지 같은 가을의 정강이를 뚝 부러지도록 걷어차도 쓸쓸함은 그냥 쓸쓸함일 .. 한줄 詩 2019.11.20
옛집에 눕다 - 김영춘 옛집에 눕다 - 김영춘 잡담의 세월을 만나 사람 떠난 빈방에 불을 지피고 옛집에 눕다 나가 살아야 되는 줄로만 알았던 스무 살 이후의 청춘을 데리고 돌아와 사십으로 눕다 빈집의 빈방 시린 구들장에 한 사내를 마음껏 눕힌 한 시대여 흐린 시야를 삼키며 또 어느 불빛 환한 거리에 발을.. 한줄 詩 2019.11.19
늙은 감나무가 말했다 - 이원규 늙은 감나무가 말했다 - 이원규 고향 하내리의 감나무를 찾아갔더니 네 청춘의 떫은 땡감들을 싹 다 누구에게 떠넘기고 왔냐며 호통을 쳤다 늙어가며 밑동 시커멓게 비우는 것은 행여나 유정란을 품기 위해서라고 내 고향 하내리의 늙은 감나무가 말하자 감나무 아래 검은 혓바닥을 내밀.. 한줄 詩 2019.11.19
드라이플라워 - 김말화 드라이플라워 - 김말화 구겨진 신문을 펴자 할머니가 웃고 있다 누구한테 받은 건지 까맣게 잊어버린 마른 꽃 다발을 싸서 버리려는데 문득 시반(屍斑)의 향기가 끼쳐온다 훅 독거노인의 죽음 신문 스크랩이 요약한 생을 들여다본다 폐지처럼 바스락거리는 옷자락 너머 구겨진 손엔 한줌.. 한줄 詩 2019.11.18
이런 식으로 서성이는 게 아니었다 - 서광일 이런 식으로 서성이는 게 아니었다 - 서광일 11월 저녁 버스 정류장 앞이었다 겨울이 도착하는 소리를 다급하게 들었다 사람들은 버스가 멈추는 지점을 향해 달렸고 몇 개의 얼굴들이 확대되었다가 사라졌다 부모와 자식은 간단명료하게 이별 연습을 하고 남편과 아내는 무관심을 들키지.. 한줄 詩 2019.11.18
더 깊은 긍정 - 전윤호 더 깊은 긍정 - 전윤호 저 개도 안 물어갈 놈 아버지가 화나면 하던 말이 자꾸 귓전을 울린다 입 하나가 두렵고 손 하나가 아쉽던 가난한 가족 불여시 같은 년 아내는 그런 말을 가슴에 담고 산다 내 속에서 개는 늙고 여우는 잿빛이 되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건 그렇게 말하.. 한줄 詩 2019.11.17
다행이다 - 함순례 다행이다 - 함순례 날 잡아 칼을 갈았다 무뎌진 날들이 숯물에 배어 흘러내렸다 주기적으로 갈아야 한다지만 선득한 날이 싫어 좀체로 칼 갈지 않고 살았다 그냥 살아야지, 하고 작정하자마자 금세 예리해진 칼날 그 기운에 움찔했던가 바로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다행이다 내가 먼저 .. 한줄 詩 2019.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