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요양병원에서 - 윤일현

요양병원에서 - 윤일현 늦은 귀가 시간 홀로 찾아간 강변 요양 병원 아흔셋의 어머니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이미 이승과 단절된 눈빛이 강물과 노니는 달빛처럼 평안하다 그 무념무상이 차라리 부럽다 *시집/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 시와반시 욕창 - 윤일현 여름이 다가오자 아버지의 욕창은 만개한 꽃처럼 절정에 달했다 날이 더워질수록 흘러내리는 진물에선 술과 마늘 썩는 냄새가 났고 개장국 비린내와 풍년초 댓진 냄새가 났다. 밀폐된 아파트 그 창틈을 용케 비집고 들어온 떠돌이 바람이 흐물거리는 상처를 핥아주면 바람처럼 살아 온 아버지의 어두운 분신들이 구멍난 피부를 통해 바람과 은밀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고 아버지의 목에서 가래가 끓을 때마다 헐벗은 내 유년의 허기진 숨소리 화투 소리, 고향 장터 작부..

한줄 詩 2020.01.28

터미널 - 조성순

터미널 - 조성순 산비탈 덕장에서 창공을 향해 줄지어 서 있는 자들은 전장에서 잡혀온 포로들이 아니다 허연 백지 흰 눈발에 전향서 따위나 쓰는 나약한 패배자가 아니다. 은하계 저 편을 유영하는 꿈이 밤마다 베갯머리를 찾아온다. 무간지옥 같던 깊은 바다 밑이나 끝닿을 때 없는 난바다의 꿈도 이젠 시들하다 밤이 오면 낡은 천 사이로 불빛이 보여 별빛이 보여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여기 왔다. 허허바다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캄캄바다는 가슴 설레는 미래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는 미래로 가는 터미널 바람과 햇살로 나약한 기운을 씻으며 전사들은 수행중이다 저 안거가 끝날 즈음 새 별자리가 생길 것이다. *시집, 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KM 얼바우 박 선생 치대*를 곡(哭)함 - 조성순 물이 끓어 국수를 솥에 넣었..

한줄 詩 2020.01.21

좋겠다 정말 그대라면 - 김남권

좋겠다 정말 그대라면 - 김남권 어둠이 내리면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불빛이 강아지처럼 기어나와 앞마당을 비단처럼 덮었으면 좋겠다 어린 계집아이의 물방울 굴러가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흰 머리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여자가 노을에 함북 젖은 미소로 바라봐 주는 집이 있으면 좋겠다 별이 호박꽃 속을 가득 채우고 아침마다 축복으로 내려주는 이슬, 햇볕으로 발라 먹으며 우물에서 갓 길어 올린 옥간수로 영혼의 씻김을 받았으면 좋겠다 풍경 소리가 노을을 향해 흔들리고 산그림자가 게으른 강물 위에서 비늘을 터는, 일곱 색깔이 모두 봉숭아물빛인 무지개를 함께 바라 볼 사람 꼭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시집, 빨간 우체통이 너인 까닭은, 오감도 그리운 노예 - 김남권 사는 게 절벽처럼 외로울 때가 있다 낙엽 밟는 소리..

한줄 詩 2020.01.21

내일의 운세 - 서화성

내일의 운세 - 서화성 지금까지 걸었던 야채시장 골목에서 삼거리 팔도실비집은 고전처럼 남는다 그만하면 색시하거나 반질했으며 또한 그렇게, 비가 내리는 정류장은 우산에 젖었을까 길을 가다가 웅덩이에 빠지거나 삼거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거나 현기증과 졸음이 심해지면 운명산부인과에 간다 때로는 관절염과 방치해 둔 치통이라는 거리의 지문들 앞서간 사람을 지우며 지문을 지운다 상갓집은 기억을 지울 수 있어 좋다고 밑창이 닮을수록 오늘을 알 수 있다고 잘 쓰진 글씨처럼 세상을 떠난 얼굴이다 *시집/ 당신은 지니라고 부른다/ 산지니 오늘과 하루 - 서화성 하루가 멀다는 생각과 오늘을 생각한다 하루를 견디다가 받지 않는 전화를 찾는다 오늘은 잘 보내고 하루는 괜찮았나요 신문을 보다가 다른 세상에서 이력서를 쓴다 내가 사..

한줄 詩 2020.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