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오무자 - 박인식

오무자 - 박인식 남들은 다 갖고 그에게 없는 것 다섯 가지 핸드폰/컴퓨터/운전면허(물론 차도 없지)/TV/신용카드 IT세상의 주거부정이자 신원불명 오무자(五無子) 어느 날 평행세계로 망명 떠났다네 하루에 해가 다섯 번 뜨고 두 번 져 세 개의 해가 하늘 밝히는 그 평행세계도 이미 IT세상 평생 IT를 거부한 역설로 가상현실적 증강현실적 불법체류자로 찍혀 거기서도 추방되고 말았다네 존재 의미도 존재 자리도 잃어버린 그는 나 *시집/ 러빙 고흐 버닝 고흐/ 여름언덕 공중전화가 알려준 내 사회적 계층 - 박인식 핸드폰 없는 내게 공중전화는 구원이다. IT세상은 50만 대 넘던 공중전화를 4만 대로 줄여 놓았다. 구원은 오지 않는다 해도 공중전화를 아주 없애지는 못한다네. 공중전화 입으로 구원요청할 수밖에 없..

한줄 詩 2020.01.07

희미해진다는 것은 - 부정일

희미해진다는 것은 - 부정일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뭍으로 간 얼굴 떠올려본다 막살이 하나 없이 손 벌릴 처지도 아니었다 자존심마저 흔들릴 때 뭍으로 떠나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인연 만들며 살고 있을 사람 한때는 서로에게 의미 있는 날들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절망이어서 쪽박은 깨지 말자 침묵하는 이 어느 포차에 앉아 한 잔의 술을 마신다 마리아가 보고 싶다고 내게 오시겠는가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농부처럼 어제와 같은 오늘 보내며 언젠가는 찾아오리라 생각한다 강물이 흐르듯 날은 가고 뭇사람이 오고 가는데 오뉴월 깨꽃만 피었다 아주 사소한 일처럼 다시 진다 쇠비름처럼 매고 돌아서면 무성한 것이 그리움이라면 희미해진 사람 붐비는 주막, 탁주항아리 동이 났다고 잊혀질까 아주 하얗게 ..

한줄 詩 2020.01.06

송해 씨 덕분에 - 박대성

송해 씨 덕분에 - 박대성 한 사람의 생애를 반백 년 넘도록 중계한 예는 없었다 그럴만한 사람도 드물고 그럴만한 생애도 드물다. 할아버지가 지어준 복희라는 이름 덕일까 바람 받지 않을 작달막한 몸피 덕이었을까 일요일의 남자 송해 씨가 '전국 노래자랑'을 외치며 삼천리 방방곡곡을 불러내면 우리는 모두 우수상 최우수상 후보가 되곤 하는데 무대에 오른 이모 고모 삼촌 조카 당숙이 춤추고 돌 백일 집들이 시집 장가가 춤추고 오대양 육대주 잔치가 되는데 송해 씨보다 젊다 송해 씨보다 목이 길다는 이유만으로 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며 일주일에 한 번 운수 좋으면 우리들의 생애도 인기상 장려상쯤은 될 거라는 딩동댕딩동 그런 꿈을 송해 씨 덕분에 꾸는 것이다. 시집/ 아버지, 액자는 따스한가요/ 황금알 옆이라는 무덤 ..

한줄 詩 2020.01.03

회전목마, 겨울 - 조항록

회전목마, 겨울 - 조항록 아무도 타지 않은 회전목마가 서 있다 햐얀 콧김 뿜으며 달리고 싶은데 두근거리며 담담해지며 돌고 돌아 제자리이고 싶은데 좋은 날은 갔나 봐 어쩌면 영영 쇠처럼 굳고 단단할수록 뼛속 깊이 출렁거리는 것이 있다 적멸의 시간 그게 다 얼어 이렇게 차가운데 누가 손을 내밀면 앙상해진 갈기가 움츠려드는데 내달리지 못하는 다리는 말뚝인가 봐 어디로 달아나지도 못하게 하는 저물녘 빈 둥지가 된 안장에 석양이 결가부좌를 튼다 형체는 없으되 무거운 것이 올올하다 그럴 수 있다면 옛날을 버려 돌아눕고 싶은가 봐 슬쩍 혀를 깨문다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새해맞이 - 조항록 먼지를 털어내고 유성기판을 한번 돌려보자는 것이다 만날 분명한 것이 지겨워 뽕짝 한번 구슬피 뽑아보자는 것이..

한줄 詩 2020.01.02

첫, - 서화성

첫, - 서화성 기차가 떠나고 보고 싶은 단어를 쓸 수 있을까 슬픔역을 지나 고독역을 지나 다음 역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밤이 가기 전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당신과 유일하게 했던 대화와 스물아홉 눈물에서 빼곡히 적힌 달력을 지나 한동안 아팠던 골목길을 지나 천천히 걸어오고 있을까. 언제나 그랬듯 그 자리에 있을까 사랑은 언제쯤 오고 있을까 숨바꼭질하듯 왼쪽에 숨어 있을까 언젠가 밤새 앓았던 열병처럼 언젠가 날씨와 웃음이 궁금해지면 마지막 보았던 연극에서 아니면 우체통에 남겨진 먼지에서 그렇게 달빛과 걸었던 갈대밭에서 등 돌린 당신의 얼굴을 그릴 수 있을까 천둥과 봄이 온다며 비온 뒤 떨어지는 꽃잎이 궁금해진 날, 어깨를 나란히 했던 어느 빛바랜 사진에서 노을빛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강둑에서 기다리리..

한줄 詩 2020.01.01

턱으로 말할 나이 - 육근상

턱으로 말할 나이 - 육근상 전화통 잡으면 보통 두 시간 얘기하다 내일 엄마 보러 집에 올 거지 안부 묻고는 그랴 내일 보자 그런디 니 신랑 잘 해주냐 다시 시작하는 것인데 콧등 문지르고 미간 찌푸려 한 참 듣다 니 형부 아휴 그 영감탱이가 잘 해주긴 뭘 잘 해줘 다 포기했다 해주면 좋고 안 해주면 더 좋고 빤스 바람으로 텔레비전 보며 킥킥거리는 나를 바라보다 아랫도리 향해 체육복 바지 집어 던지더니 턱 주억거려 얼른 입고 방으로 들어가라며 손사래다 텔레비전 끄고 바지에 발 끼다 생각하거늘 먹을 때도 잘 때도 입을 때도 이제는 턱으로 말할 나이되었느니 *시집, 우술 필담, 솔출판사 친구 - 육근상 소파 누워 새로 구입한 휴대전화 만지작거리며 사진 찍어보고 인터넷 검색해보고 맛집 알아보고 손쉬운 방법 찾아..

한줄 詩 2019.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