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요양병원에서 - 윤일현

마루안 2020. 1. 28. 22:07

 

 

요양병원에서 - 윤일현

 

 

늦은 귀가 시간

홀로 찾아간 강변 요양 병원

아흔셋의 어머니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이미 이승과 단절된 눈빛이

강물과 노니는 달빛처럼 평안하다

그 무념무상이 차라리 부럽다

 

 

*시집/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 시와반시

 

 

 

 

 

 

욕창 - 윤일현


여름이 다가오자 아버지의 욕창은
만개한 꽃처럼 절정에 달했다
날이 더워질수록 흘러내리는 진물에선

술과 마늘 썩는 냄새가 났고
개장국 비린내와 풍년초 댓진 냄새가 났다.
밀폐된 아파트 그 창틈을

용케 비집고 들어온 떠돌이 바람이
흐물거리는 상처를 핥아주면
바람처럼 살아 온 아버지의 어두운 분신들이
구멍난 피부를 통해
바람과 은밀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고
아버지의 목에서 가래가 끓을 때마다
헐벗은 내 유년의 허기진 숨소리
화투 소리, 고향 장터 작부의 육자배기
저물녘 우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서럽게 흐느끼던 어머니의 까닭모를 울음
잊고 싶은 그 모든 소리들이 귓가에 쟁쟁거려
아버지의 85년 생애가 미웠고
욕창과 가래 끓는 소리가 진저리나도록 싫었다

백일 탈상 날
아버지의 무덤엔 어느새 날아와 뿌리내린
들꽃 한송이 천상의 향기를 내뿜었고
아이들은 내 몸에서 풍기는
술과 담배 냄새가 싫다고 했다

 

 

 

 

# 윤일현 시인은 1958 대구 출생으로  1994년 <사람의 문학>, <현대시>,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낙동강>, <꽃처럼 나비처럼>,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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