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설날 - 이시백

마루안 2020. 1. 27. 21:33



설날 - 이시백



골목 어귀에 며칠은 먹을 만한
서너 주먹의 멸치가 놓여 있다
집안의 안위를 위한 민속신앙인가
배고픈 짐승들을 위한 배려인가
어쨌거나 괜찮게 살고 있는 3층 양옥집
대문 앞에 놓은 멸치들
한때 인석들은 푸른 바다를 휘어잡으며
배에 힘을 주어 유영했을 터
어쩌다가 어부 손에 이끌려
예까지 왔으니 모두 팔자소관이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아무도 몰라
다만 지금 이 추위에 한데서
새해를 맞이하는 멸치 가족
돋는 햇살에 언 몸을 녹이고 있는
서울역 대합실의 홈리스처럼
긴 다리를 오므리고, 허리 접은 영혼 앞에서
난, 그저 숨도 못 쉬고 바라볼 뿐
흰 빛이 더욱 햇살에 빛나는 동안
멸치가 걸어온 길 더듬어본다
내 몸도 비릿하게 느껴지는 게
나도 길섶에 있는 멸치 같다
허리 구부리며 몸 도사린 채
골목길을 서성인다
단단히 걸어 잠근 대문들을 지나며
한 마리 작은 멸치가 되어



*시집, 아름다운 순간, 북인








아름다운 순간 - 이시백



살다보면
순간의 기다림이 아름답다


2차선 도로에 비상등 껌벅껌벅
기다리는 검은 승용차 아름답다


종이 박스를 한가득 실은
짐수레 할배
샛길로 벗어날 때 까지


좁은 길 넓혀주려 가지 오무리는
아름드리 나무 아름답다


가로등 더욱 환하게
비추는 불빛 아름답다


나 다시 사랑하지 않으리~


주미연의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노랫소리 아름답다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밤 길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름이라는 망명지 - 이은규  (0) 2020.01.28
요양병원에서 - 윤일현  (0) 2020.01.28
한없이 깊고 짙푸른 허공에 - 한승원  (0) 2020.01.22
터미널 - 조성순  (0) 2020.01.21
두부 중년 - 정윤천  (0) 2020.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