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노인이라는 잠언 - 조항록

노인이라는 잠언 - 조항록 노인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간다 어디서든 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등이 굽고 손가락이 굽고 오후의 햇살이 다 구부러지면 시나브로 숲에 다다르리라 저녁은 향기로운 흙냄새에 물들며 얌전한 맥박같이 이어진 오솔길에는 이미 인적이 끊겼다 나뭇잎을 두드려보아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산새들은 다친 날개를 접어 둥지에 들고 별빛은 심연으로 잠기고 노인은 알고 노인이 아닌 사람들은 모르는 척하는 것 슬픔도 혼자 즐거움도 혼자 너는 나를 모른다는 것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입춘 - 조항록 밤새 비 내려 유리창이 푸르다 계절은 사람보다 다채로운 음계를 밟고 달라진다 봄이 온다, 도돌이표 많은 악보를 들고 왔던 너처럼 나는 봄의 겨울에 얼굴을 비추어 여태 들러붙은 서리를 닦아..

한줄 詩 2020.02.05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 서화성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 서화성 신신파스를 누르고 있었다 동공을 타고 허리 반대편에서 걷는다는 것이 힘든 적이 있었다 가끔은 미인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 하늘을 본 적이 있었다 첫사랑을 지우고 찾은 적이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하루가 지나가고 견우와 직녀를 생각하다가 잃어버린 나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잘 잘, 살고 있는 거지 불면증 때문만은 아니었어 열두 번째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끔은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가끔은 말이야, 내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시집/ 당신은 지니라고 부른다/ 산지니 샤워를 하고 - 서화성 오십은 몸에서 어디쯤일까 걷기가 편안하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뱃살이 나올 때 솜사탕을 먹는 것은 취미가 아니었고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서 샤워를 ..

한줄 詩 2020.02.03

바깥의 나 - 박인식

바깥의 나 - 박인식 나이 먹는다는 것은 그 많던 내 안의 나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일 내 안의 나보다 바깥의 내가 더 많아지는 일 내 안의 나를 바깥의 내 눈으로 들여다보는 일 내가 사라진 나 없는 세상을 나로 살아갈 그 모든 바깥의 나 어깨 두드려주는 일 *시집/ 러빙 고흐 버닝 고흐/ 여름언덕 변명 - 박인식 내 삶은 될수록 가난하게 살려는 노력이었다 (가난해지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다) 될수록 이름 없이 살려는 노력이었다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했지, 글을 이름으로 팔려고 애쓰지 않았다) 가난과 무명은 나의 오만이었고 가족의 원죄였다 오래도록 나는 가족 바깥에 있었다

한줄 詩 2020.01.31

북향의 화단 - 성봉수

북향의 화단 - 성봉수 북향의 화단에는 봄이 오기 전에는 눈이 녹지 않으리라 겨울을 잡고 맞은 이별은 이별로 얼어 늘 떠나가고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얼어 가슴 속을 아프게 긁는 시린 바람의 면도날이 되었다 귓불이 아리도록 서러운 어느 겨울 나는 북쪽으로 난 화단 옆에 발가벗고 앉아 겨울을 잡고 떠나지 못하였는데 그렇게 지키고 선 모든 사랑과 모든 증오와 모든 만남과 모든 헤어짐과 나서지 않는 겨울과 맞아 설 수 없는 봄도 한몸이면서도 서로 어우를 수 없는 막대자석의 이 끝과 저 끝이었으리라 내 마흔 몇 해, 북쪽으로 걷던 그해 겨울 북향의 화단 옆에 발가벗고 앉아 겨울을 잡고 떠나지 못하였는데 *시집, 바람 그리기, 책과나무 탁발 - 성봉수 부황 든 오늘에 지난 울력은 부질없느니 동안거의 수행이란 거짓이라..

한줄 詩 2020.01.30

기억의 내부 - 천융희

기억의 내부 - 천융희 -알츠하이머 오래된 마을에는 오래된 사람들로 헐렁하고 그들은 같은 속도로 늙어 가고 대부분 최초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빈 가지에 주저앉은 눈동자로 균형을 잃고 헤매는 구름만 무성하고 주름진 골목 어귀 기우뚱한 회전의자가 정물처럼 낯설게 놓여 있다 삐걱, 갑자기 친절해진 방문객들은 매우 공손하게 그들을 안내한다 한 번 내디딘 발은 결코 되돌리지 못한답니다 더욱 깊어진 더욱 높고 더욱더 단단한 고립의 벽 대체 바람은 얼마를 더 삐거덕거려야 모서리가 닳을 것인가 둥글어질 것인가 기억의 내부가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고 몸의 각도가 등과 바닥을 중심으로 집중한다 당신이 앉았던 자리 또 다른 당신이 빛바랜 등받이와 움푹 팬 바닥 사이로 당신이 앉았던 자리 또 다른 어느 날, 문득 당신이..

한줄 詩 2020.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