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옛집의 기억 - 이철수

옛집의 기억 - 이철수 군불을 지피는 저녁, 흙집 아궁이에는 그을음 앉은 누대의 입들이 시뻘건 불덩이를 물고 있었네 그 완강한 불의 혀를 악물고 버팅기던 뼈마디들 홍보석 다비를 입회 하듯, 화엄의 후림불 앞 버언해진 궁핍의 입구에 앉아서 부지깽이 같은 알몸으로 맥없이 뒤적이는 불씨 속에는 낫처럼 야부로시 돌아나가지 못한 허공의 어둔 골목들이 있어 몽우리진 마음의 빈 노적가리를 둥글게 돌다돌다 지치면 긴 방죽길 오래 걸어서 붉은 달을 굴리며 몇 번씩 헛배를 채우던 바람의 씨앗들 멍석 깔린 골방 갈라진 흙벽 틈새로 스몃스몃 피어오르던 헛헛한 연기들은 어느 물길 잃은 어족의 상한 지느러미일까, 무명(無明)의 시간을 유영하며 지상에 발 딛지 못하는 모르피나비처럼 아픈, 저 허공의 춤사위 어둠보다 더 깊은 목울대..

한줄 詩 2020.02.26

피내림 - 김윤배

피내림 - 김윤배 -유랑광대 24 그 숨막히는 접신 거부의 손사래 꺾이고 내 어머니 마침내 이름없는 만신으로 방울부채 펴 드실 제 어머니 피울음 방울방울 피울음 들었나이다 헛보임 헛들림 떨치시고 시퍼런 부엌칼 휘저어 동서남북 가르시던 내림굿 마당 캉캉 우는 쇳소리 접신의 황홀함 꼭두서니로 번지는 어머니 얼굴 보았나이다 만신이 되어 무당이 되어 당굿 병굿 자리걷이 넋건지기 살풀이춤 시나윗가락 넘나들며 신당 뒤란 어둠 열고 징소리 북소리 젖꼭지로 물려주신 어머니 걸맆패 상쇠소리만 들어도 피가 솟고 한풀이 춤판 무명배 찢기어도 어깨 들리고 이 땅 수없이 펄럭이는 만장 펄럭여 피가 솟고 어깨 들려 두근거림의 큰강물이 되는 나는 어머니 피내림이 아닐지요 *시집, 떠돌이의 노래, 창작과비평 남도 삼백리 - 김윤배 ..

한줄 詩 2020.02.23

잡초 앞에서 - 윤일현

잡초 앞에서 - 윤일현 같은 부류끼리 모여 있다고 서로 아끼며 사랑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한 모금 물을 위해 동료의 발목을 잡고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뿌리들을 보아라 찹초면서 잡초 아니라고 우기는 자들을 멀리하라 보이지 않는 얼룩과 폐부 깊숙한 곳의 악취가 언젠가는 네 자리를 오염시킬 것이다 잡초 아니면서 잡초인 체하는 자들도 경계하라 순진한 것들의 줄기와 잎에 올라타고 교묘히 제 이익만 취할 것이다 모양과 빛깔이 좀 다르다고 함부로 몰아붙이며 괴롭히지 마라 뽑혀 던져지는 순간까지의 초조함, 그 불안감이 너를 쏙 빼닯지 않았는가 세상 모든 풀과 꽃은 잡초면서 잡초 아니다 누가 노을에 젖어 강바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누가 비바람에 힘없이 쓰러지는 것들을 위해 기꺼이 낯가리지 않고 작은 어깨 내주는가 *..

한줄 詩 2020.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