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이 들어 같아지는 것 - 박철영

마루안 2020. 1. 20. 21:08



나이 들어 같아지는 것 - 박철영



문득문득 세상 살며 보는 것들이
너나 내나 비슷해진 것을 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기 살기로
줄을 세우던 것들도 이젠 무의미하다
사람 앞에서 한땐 험상궂던 얼굴들도
선암사 대각암 뒤 바위에 새겨진
미륵불을 닮은 듯도 하고
길가에서 스치는 사람들
언젠가부터 알던 사람 같다
어디 그뿐이랴
찾아간 낯선 곳이 너무나 익숙해
놀란 적이 많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다들 남 사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
울컥할 때 찾아간 산사에서 만난 사람들
얼굴이 부처를 닮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 사는 한평생도 별거 아닌
서로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같아지는 것이다



*시집, 꽃을 전정하다, 시산맥사








외면 - 박철영



겨울 무처럼 바람 든
그 집을 빠져나간 열네 살 내 또래
제 정신으로는 고향을 찾아올 수 없어
생애 고통을 백팔 염주로 꿰어왔다
긴 시간 아비의 이름 지우느라
겹으로 쓸린 독한 인연
지문 속 시간으로 내장된 듯 표정은 아연하다
객지 나와 사들인 도월리 논배미
삼복 다 지나도록
수리조합에서 감질나게 흘려보낸
물길 따라온 피래미 몇 마리와
하얗게 배 뒤집고 나뒹굴던 벼 포기들
천식 앓듯 단명으로 죽어 나자빠지던
지난여름의 긴 가뭄
궁금해서 찾아간 도월리
가망 없던 벼가 누렇게 익어 찰랑거린다
살간 바람 안듯 벼 모가지를 만지는데
고개 푹 꺾더니 외면해버린다
삼복 지나서도 나 몰라라 했던 행색처럼
콧잔등을 파고드는 쉰내에
발길 돌려 나오는데
육십 다 된 몸으로 고향 찾아온
또래 마음이 어떤가 알만하다






# 박철영 시인은 1961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방송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문단에 나왔고 2016년 <인간과 문학> 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비오는 날이면 빗방울로 다시 일어서고 싶다>, <월선리의 달>, <꽃을 전정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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