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터미널 - 조성순

마루안 2020. 1. 21. 19:37

 

 

터미널 - 조성순


산비탈 덕장에서 창공을 향해 줄지어 서 있는 자들은
전장에서 잡혀온 포로들이 아니다
허연 백지
흰 눈발에 전향서 따위나 쓰는 나약한 패배자가 아니다.

은하계 저 편을 유영하는 꿈이 밤마다 베갯머리를 찾아온다.

무간지옥 같던 깊은 바다 밑이나
끝닿을 때 없는 난바다의 꿈도
이젠 시들하다
밤이 오면
낡은 천 사이로 불빛이 보여
별빛이 보여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여기 왔다.

허허바다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캄캄바다는 가슴 설레는 미래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는
미래로 가는 터미널

바람과 햇살로
나약한 기운을 씻으며
전사들은 수행중이다

저 안거가 끝날 즈음 새 별자리가 생길 것이다.


*시집, 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KM



 

 

 

얼바우 박 선생 치대*를 곡(哭)함 - 조성순


물이 끓어
국수를 솥에 넣었는데
그를 건져
함께 먹을 사람이 오질 않는다

노새 타고 먼 길 떠난 사람아

바람결에 들려오는
술추렴 하다가도
불 없는 고물 자전거로 이십 리 길 달려갔다가
설한의 새벽, 어둠 더듬어 출근길에 올랐다는
삼년을 하루같이 아버님 빈소 지킨

남 가슴에 못 박는 말
빈말 허투루 하지 않던
늘 부끄러운 듯
얼굴에 단청불사 곱게 하시고
묵묵하던 얼룩바우여

술이 괴어
이제 걸러야 하는데
함께할 사람이 오질 않는다
아나키스트 박열의 삶을 기리어
우리 살림살이 형편 묻더니

문득
노새 타고 떠난 사람아


*박치대(?-2009): 소설가. 작품으로 <아, 백두여>, <올가미>,<진달래 피고 지고> 등이 있으며, 2009년 이월 초 생을 졸(卒)하다.


 

 

*자서

이미 한 편의 詩인데


세상살이 이 한 편의 詩인데 무늬를 더해서 뭐하나 하다가 그래도 허전하고 아쉬워 상을 차렸다.

차란 게 없어 가시는 발걸음 돌부리에 채일까 봐 걱정된다.

겨울 햇살 한 올 만치라도 가슴에 닿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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