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좋겠다 정말 그대라면 - 김남권

마루안 2020. 1. 21. 19:10

 

 

좋겠다 정말 그대라면 - 김남권

 


어둠이 내리면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불빛이 강아지처럼 기어나와
앞마당을 비단처럼 덮었으면 좋겠다
어린 계집아이의 물방울 굴러가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흰 머리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여자가 노을에 함북 젖은 미소로
바라봐 주는 집이 있으면 좋겠다
별이 호박꽃 속을 가득 채우고
아침마다 축복으로 내려주는
이슬, 햇볕으로 발라 먹으며
우물에서 갓 길어 올린 옥간수로
영혼의 씻김을 받았으면 좋겠다
풍경 소리가 노을을 향해 흔들리고
산그림자가 게으른 강물 위에서
비늘을 터는, 일곱 색깔이 모두
봉숭아물빛인 무지개를
함께 바라 볼 사람
꼭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시집, 빨간 우체통이 너인 까닭은, 오감도

 

 

 

 

 

 

그리운 노예 - 김남권



사는 게 절벽처럼 외로울 때가 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서걱거릴 때
가슴에서 빗소리가 나도록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시월 하순 달빛이
강물에 풀잎처럼 젖어들 때
그 풀잎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혼자 마시는 술잔이 비어갈 때마다
술잔 가득 채워지는 별을 보며
별빛 흠뻑 받은 달맞이꽃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랑은 그리움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맛있는 식사라면
그리움은 사랑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아름다운 노동이기에

사는 게 절벽처럼 외로워
시월 하순 달빛이 강물에 풀잎처럼 젖어
혼자 마시는 술잔이 속절없이 비어갈 때도

나는 등대 불빛에 소주를 익혀 먹는
나그네처럼, 달맞이꽃에 내려앉은
별떨기에 사랑을 팔아서
그리움을 사는 노예가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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