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없이 깊고 짙푸른 허공에 - 한승원

마루안 2020. 1. 22. 22:26



한없이 깊고 짙푸른 허공에 - 한승원



여닫이 연안의 흰 모래밭을 걸어가다가
모래알들의 아득한 영겁의 시간에
유한한 생명체인 내가 발자국을 찍고 있다 생각되어
가슴 두근대며 걸어가다가 돌아서서
한 가엾은 늙은 짐승이 찍어 놓은
단조롭고 유치한 상형문자 같은 시간의
발자국들을 보고 거기에도
신화 한 가닥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서 있다가
건강하게 오래 산 자가 최후의 승리자라는 말을
생각하다가
그게 미욱한 자의 오기 어린 말인 듯싶지만
어쩌면 진리일 수 있다고 합리화하다가
영겁을 살고 있는 모래 앞에서 뱉어낸 스스로의
무지한 그 오만을 부끄러워하다가
머지않아 밀물이 들어오면 지워지고 말
허무한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가다가 허공을 쳐다보았는데
한없이 깊고 짙푸른 거기에
발자국을 찍어 남기려 하는 미욱한 무당새 한 마리 날고 있었다



*시집, 꽃에 씌어 산다, 문학들








늙은 미망의 벌레 - 한승원



두 눈꺼풀이 처져서 앞이 흐려 보이고
헐거워진 눈물샘 조리개로 인해 눈물이 자꾸 질금거린다
늘 책이 고파서 처진 눈꺼풀을 억지고 치뜨고
책을 펼쳐 들곤 하는데, 눈알이 시리고
글자들이 개미들처럼 기어가곤 하는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정원을 거닐며 푸른 산과 쪽빛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얼마쯤의 시간을 흘려 보내야 하는데,
이 늙은이를 관리하는 아내는
처진 눈꺼풀을 치올려 꿰매는 수술을 하라고
보채지만 나는 거절하고 거슴츠레한 눈을 고수하는데,
허공이 빈정거린다 네가 무슨 부처님이라고
게슴츠레 반개한 눈으로
시궁창 속에서 피어난 연꽃 세상을 즐기려 하는 거냐
눈물이 질금거리는 것을
중생을 불쌍하게 보는 성스러움이라 망상하는 거냐
이 늙은 미망의 벌레야






# 한승원 선생은 1939년 전남 장흥 출생으로 1968년 <대한일보>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열애 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달 긷는 집>,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이별 연습하는 시간>, <꽃에 씌어 산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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