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활자에 호기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 옆 마을인 친구 집에 놀러 갈 때가 많았다. 친구네는 엄청 부자였다. 친구 엄마는 내게 자주 와서 아들과 숙제도 하고 놀다 가라고 했다. 친구는 잘 사는 데 반해 공부를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한 교실에 보통 60명 남짓 있었다. 출석 확인도 이름보다 번호를 불렀다. 시험을 보고 나면 담임이 성적을 불러 주었는데 50 등 내외였던 그 친구가 38 등을 했다고 좋아라 하던 생각이 난다. 나는 학창 시절 늘 1, 2등을 다퉜고 3등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친구는 필기구도 고급이고 전과와 수련장이 가득했다. 나는 언감생심이었다. 친구 엄마가 가루를 탄 오렌지 주스와 가끔 과자도 주었다. 그것 얻어 먹는 재미도 있지만 친구 방에 가득한 세계문학전집과 잡지 어깨동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놀다가 집에 갈 때면 꼭 한 권씩 빌려 왔다.
그때 플란더스의 개를 읽으며 엄청 울었다. 이상무 만화에 나오는 독고탁도 좋아했다. 독고탁은 엄마가 자기를 낳다가 돌아가시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큰 누나는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다. 중학생 작은 형은 늘 사고를 치는 말썽꾸러기였다.
그 만화를 보면서도 자꾸 눈물이 나와 훌쩍거렸다. 40년이 훨씬 지난 세월인데도 만화 이야기가 생생하다. 이 시집을 읽다가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얼마간은 불량하게>는 조하은의 첫 시집이다. 몇 편 읽으면서 묘한 흡인력으로 시집에 홀딱 빠져들었다.
어라? 내 살아온 내력을 아는 이 몇 되지 않은데 시인의 경험이 딱 내 이야기처럼 들렸다. 반복해서 읽으며 시인을 탐색했다. 이 시인은 시 잘 쓰는 것은 말할 것 없고 꾹꾹 눌러 쓴 시들을 가슴에 먼저 새겼겠구나 싶었다. 공감 가는 시를 만나면 이렇게 마음이 설렌다.
시집 제목부터 내용까지 어느 것 하나 그냥 넘겨지지 않았다. 나의 국민학교 4학년, 담임은 출석을 부른 후 육성회비를 안 낸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냈다. 열 명쯤 불려 나왔을까. 첫날은 경고하는 것으로 지나갔다. 이튿날은 너댓 명쯤 불려 나왔고 그 다음 날은 나와 한 아이만 남았다.
나는 선생님의 경고에도 육성회비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따귀를 몇 대 맞고 수업 시간 내내 복도에서 의자를 들고 서 있어야 했다. 팔이 아파서도 눈물이 났지만 동무들 앞에서 가난을 증명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그날 쉬는 시간에 내 의자를 교실에서 가장 가벼운 의자로 바꿨다.
*육성회비 봉투를 비어 있는 채로 들고 간 날
등을 떠민 담임선생님은
빈 봉투 대신 들고 온 날고구마로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빈 봉투와 생고구마가 날아오르던 교실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의자를 들고 벌을 섰다
*시, <첫눈> 일부
이 시는 가난을 경험하지 않으면 공감을 할 수 없는 시다. 나만 울컥했을까. 이 시집 곳곳에 생채기 난 삶을 잘 수선해서 살아 남은 생애를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세상은
두 눈 감을 때 품고 갈 마지막 이름과
지우고 싶은 시간 속에 있는 사람 사이의 전쟁
*시, <시간의 경계에서> 일부
시집을 끝까지 읽으면 절망 속에서 긍정의 희망이 보인다. 굴곡 많은 인생일수록 살아 있음을 지탱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이 시인은 시를 쓰는 것이 삶의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나 같은 독자는 이런 시를 읽는 것이 더 큰 위안이다. 지켜볼 만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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