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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밤이 온다 - 우혁 시집

갈수록 마음 가는 시집 만나기가 힘들다. 그런 와중에 눈에 번쩍 들어오는 시집을 만났다. 우혁의 첫 시집 다. 진공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이렇게 공감 가는 시집을 만나면 떨리면서 기쁘다. 내친 김에 반복해서 읽었다. 우혁 시인은 1970년 출생으로 한국외대에서 인도어를 전공했다. 인도어가 어떤 언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거대한 인구 대국 인도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삶창에서 나오는 시집은 가능한 읽으려고 하는 편인데 이 생소한 이름이 박힌 시집을 별 기대하지 않고 들췄다가 제대로 빨려 들어갔다. 우혁이라는 짧아서 외우기 힘든 이름이 본명은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이 시인을 마음에 담는다. *절벽 같은 마음으로 길을 핥아본다 나는 길의 미식가 누추하고 남루한 사연은 좀 접자 내가 닿아..

네줄 冊 2021.12.27

대광여인숙 - 석정미

대광여인숙 - 석정미 -꼽추 아저씨 유난히 지렁이가 많던 골목 햇볕은 따갑고 얇은 살 속으로 모래가 박혔다 꼽추에 난쟁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손수레, 좀약, 까만 고무줄 실은 세상에 필요한 슬픈 것들 사람들은 슬픔인 줄 알면서 골라 갔다 바닥을 끄는 지렁이 길 침을 뱉고 지나갔고 땡볕에 붉어지는 등 밟혀도 낮은 길뿐 저녁이면 대광여인숙 낡은 지붕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에 파란 소주병이 기울고 꿈길처럼 밀려오는 모서리 저녁노을 꼽추 아저씨도 세상의 지렁이도 날개가 없어 슬펐던 날들 밤이 오면 대광여인숙 간판에 백열등이 켜진다. *시집/ 대광여인숙/ 어린왕자 대광여인숙 - 석정미 -앉은뱅이책상 작은 도랑을 하나 끼고 검은 통로 어둡고 긴 자취방 키만큼의 공간만 허락해 연탄불로 온기 나누던 방죽처럼 길쭉한 직..

한줄 詩 2021.12.27

택배 - 최규환

택배 - 최규환 파업이 끝났고 눈을 밝게 비춰줄 스탠드가 도착했다 삶에 대한 밝은 이해가 필요했던 것인데 상자를 놓고 간 그에 대한 이해는 파업이 끝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기슭에서 보내온 늙은 어미의 편지 혹은 잠든 아이를 뉘이며 막차가 끊어지기 전 돌아오겠다던 마음이 혹은 깡마른 놈과 눈이 맞아 짐을 싼 아내를 포기해버린 또는 고독사를 준비하며 남은 며칠을 더 살고 있을 아니면 치솟는 집값에 사랑을 포기한 청춘이었을 그런 택배 절체절명의 속속들을 문 앞에 두고 간 통로엔 바람이 서성거렸고 파업은 끝났으나 기한 없는 삶으로 인해 빈 상자의 여운과 마주하는 기막힌 이 시대의 허기 나는 조금 더 두툼하게 스탠드 밝기를 조절한 후 별수 없이 간격 사이에 허망한 그림자를 앉혔다 *시집/ 설명할 수 ..

한줄 詩 2021.12.26

고마운 일 - 김주태

고마운 일 - 김주태 아이들이 어릴 때 이 동네로 와서 아직까지 살고 있다 이름 없는 잠바를 입고 이이들은 즐겁게 힙합을 따라 했고 가끔 먼 곳으로 떠날 꿈을 꾸다 돌아오는 날이면 집을 잃은 큰 개가 현관에 버티다 끌려갔다 또래들은 하나둘 골프장으로 가고 땅을 보러 다니고 동네 사람 반이 신축 아파트로 옮겨 갔지만 우리에겐 늘 넉넉한 저녁이 있었다 코코넛을 씹으며 딸은 누구나 가는 대학을 고르는 중이고 점심 먹고 나간 아들은 소식이 없다 아내와 나는 낡아가는 외벽처럼 아무리 닦아도 빛나지 않은 돌처럼 굳어간다 이런 것이 편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다 *시집/ 사라지는 시간들/ 삶창 아버지 - 김주태 남의 사과밭에 들어가 익지도 않은 풋사과를 작대기로 내리치다 주인한테 들켜 개처럼 맞고 집에 오자 ..

한줄 詩 2021.12.26

어느 별의 편지 - 이윤설

어느 별의 편지 - 이윤설 우리는 사막의 절반을 지나왔으니 이 기후가 바뀌어도 이젠 좋겠다 우주는 먼 시간을 돌아 순환한다는데 화석이 부서져내리며 이제는 내 차례가 되어도 좋겠다 하늘이 준 눈물과 마른 땅이 고요히 입맞춤하는 계절이 나의 별에 시작되어도 좋겠다 그 사막의 폭풍이 지나가는 길에 나는 죽은 나뭇가지로 모래에 귀를 대고 누워 있었으나 누운 채로 오래도록 뜨거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최초의 나무가 시작되는 것을 당신이 숲이 되어 치마를 끌고 나와 그 치마폭에 나를 주워가줄 것을 알고 내 가지는 내 뿌리가 될 것을 알고 떠났던 잎들과 비와 향기로운 바람과 함께 당신이 오기 쉽도록 모닥불을 피우고 별은 양치기를 찾아 줄지어 떠나가는 하늘 아래 이 사막은 모래를 모두 쏟아버리고 맑은 유리잔 같은 ..

한줄 詩 2021.12.26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 최규환 시집

읽기 껄끄럽지 않으면서 스펀지에 물 스미듯 조금씩 가슴을 적셔오는 시집이 있다. 이 시집이 그랬다. 두 번째 시집이라는데 나는 처음 만난 시인이다. 1993년에 등단했으니 년식이 다소 오래 되었다. 그런데도 시에서 오래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반면에 시집 곳곳에 촘촘하게 새겨진 나이테의 단단함이 제대로 전달된다. 년식은 낡은 것이 아니라 적당히 숙성한 것이다. 시인의 말에 이런 문구를 남겼다. 오랜 기간의 공백이었으나 멀지 않은 날들의 기록이다. 예민하지 못했던 삶에게 값을 치르는 시간이었거나 스스로 익숙해지는 허물이었다. 자신을 설명하는 방법도 여럿이나 시인의 말은 이렇게 쓸 일이다. 가족에게 고맙다거나 아내에게 바친다거나 하는 일기장 메모 같은 시인의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첫장에 실린 시인의 ..

네줄 冊 2021.12.23

편히 잠들려면 몸을 바꿔야만 해 - 김선우

편히 잠들려면 몸을 바꿔야만 해 - 김선우 -구름에게 배운 것 ​ 구름이면서 구름들이지 지금의 몸을 고집하지 않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스미는 일에 머뭇거림이 없지 ​ 두려움 없이 흩어지며 무너지고 사라지는 게 즐거운 놀이라는 듯 다시 나타날 땐 갓 태어난 듯 기뻐하지 그게 다지 곧 변할 테니까 ​ 편히 잠들기 위해 몸을 이동시키는 법을 나는 구름에게서 배웠네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도 ​ 그러니 즐거이 변해가는 것 내가 가진 의지는 그게 다지 ​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일반화된 순응의 체제 3 - 김선우 -아무렇지 않은 아무의 반성들 현실의 식탁과 보이는 식탁과 보여지고 싶은 식탁 사이 품위 있게 드러내기의 기술 등급에 관하여 관음과 노출 사이 수많은 가면을 가진 신체에 관하여 곁에 있는 것..

한줄 詩 2021.12.23

칼날에 마음이 베일 때 - 박주하

칼날에 마음이 베일 때 - 박주하 오래전 지하철 순환선에서 칼갈이를 팔던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뒤집개를 들고 서서 바이올린을 켜듯 칼 가는 시늉을 하던 칼을 들고 다니면 안 되니까 칼갈이의 성능을 보여 줄 수가 없어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던 그곳에서 귀보다 먼저 가슴에 꽂힌 목소리를 한 번도 잊고 두 번도 잊었는데 칼을 쥘 적마다 떠오른다 홀로 답이 되는 날이면 손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칼갈이를 찾는다 *시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걷는사람 멀리서 오는 生 - 박주하 사무치게 걸었다 파묻히지 않으려고 길들은 여전히 정처 없고 미련은 악착같이 밤을 쌓아 놓았다 어떻게 그 많은 생각을 품고 살았을까 모두 나의 것이라니 생이 점점 무거워진다 봄바람을 쪼개어 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때는 아주 작은 풀꽃으로..

한줄 詩 2021.12.23

맹그로브 나무 - 정세훈

맹그로브 나무 - 정세훈 지상의 모든 나무들은 흙 속에 뿌리를 내리지만 습지의 맹그로브 나무들은 진흙 위에 뿌리를 내린다 지상의 모든 나무들은 제 뿌리로 제 한 몸 겨우 지탱하지만 습지의 맹그로브 나무들은 서로의 뿌리로 서로의 몸을 지탱해준다 자리를 잡은 곳이 온통 진흙투성이여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맹그로브 나무들 제각각 흩어져 뿌리를 내리면 이내 모두 쓰러져 죽어버릴 맹그로브 나무들 모두 모여 함께 뿌리를 내려 서로의 뿌리에 서로의 뿌리를 엮어간다 한 그루 두 그루 열 그루 백 그루 서로의 뿌리에 서로의 뿌리를 심어간다 세세연년 맹그로브 숲을 우거지게 한다 *시집/ 동면/ 도서출판 b 동면 - 정세훈 전철역엔 함박눈 대신 스산한 겨울비가 내린다 이른 아침 출근길을 적시었던 때아닌 겨울비가 깊..

한줄 詩 2021.12.22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다 - 홍성식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다 - 홍성식 부를 이름이 줄어든다는 건 사라질 준비다 형도, 남서부 도시의 밤을 장악한 열아홉 어린 깡패 상대 조직의 칼에 찔려 스물이 되지 못했다 문석, 졸업식도 빼먹은 채 상경한 사법고시 준비생 여덟 번의 쓴잔 마시고 느티나무에 목을 맸다 영철, 여자 넷 사이를 오가면서도 들키지 않았던 카사노바 두 살 아기가 죽자 아내는 감잣국에 청산가리를 탔다 명호, 끝끝내 시인이고자 했던 해사한 문학소년 자본가 장부 정리하며 살더니 편지 한 통 없이 실종 1989년 낄낄대며 철없이 웃던 흑백사진 속 아이들 호명에도 대답이 없다. *시집/ 출생의 비밀/ 도서출판 b 스위치를 올려줘 - 홍성식 견디는 생이 지겹다 턴 오프 한 소식 들은 승려의 돈오돈수처럼 나도 뉘도 모르는 사이 심장을 데우던 ..

한줄 詩 2021.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