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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 이란희

늘 시간에 쫓기며 살기에 시간 알기를 금쪽으로 여기는 내가 이 영화는 두 번을 봤다. 포스터와 제목만 보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했던 광고 문구처럼 고상한 휴가를 생각하기 쉽지만 영화 속 휴가는 그렇지 않다. 20년 동안 일한 가구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부당해고라며 천막 농성을 했다. 그러기를 5년이다. 법정까지 간 소송에서 회사의 해고는 정당했다는 최종 판결을 받는다. 그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이 될 것인가. 노동자들은 점점 지쳐간다. 이 영화에는 밥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100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유튜브 먹방에서 먹는 음식과는 다르다. 먹방에서 먹는 음식은 노동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영화에 나오는 밥은 거룩하다. 노동의 댓가로 산 쌀과 야채로 만든 밥을 굳은 살이 박힌 손으로 먹는 밥..

세줄 映 2021.12.21

겨울밤 - 육근상

겨울밤 - 육근상 초저녁만 되어도 불 꺼지는 산중마을입니다 산고랑 내려온 바람이 고욤나무 아래 마른 눈 쓸고 가거나 엄니가 켜놓은 얼굴 흔들리거나 처마 끝 매어놓은 빨랫줄 윙윙거리면 도둑괭이 헛간 세워둔 고무래 건드렸나 개들이 컹컹 짖기도 합니다 아버지처럼 늙어간 나는 텔레비전 화면이나 멀뚱거리다 밀어둔 양재기 더듬어 호두알 깨물면 마른 손가락 같은 밤이 슬플 때가 있습니다 댓돌 가지런한 신발처럼 쓸쓸할 때가 있습니다 시한이까지만 살기로 한 통나무집 정짓간에서 각시는 마른 북어라도 두드리는지 텅텅 바람벽 울리기도 하는 겨울밤입니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밥 - 육근상 산동네 겨울은 낮이 짧아요 점심 먹고 장작 조금 패면 금방 어두워져요 대밭에 눈발 해끗해끗 날리기에 자작나무 숯불 끌어모아 곱창김 몇 장..

한줄 詩 2021.12.21

변신 이야기 - 김수우

변신 이야기 - 김수우 남부민동 산복도로 골목 점집 간판이 많다 신을 닮은 먼지들과 먼지를 닮은 신들 천궁으로 갔다가 용궁으로 갔다가 아씨가 되었다가 할매가 되었다가 보살을 부르다가 도깨비를 부르다가 몸을 바꾼다 장롱 밑에서 찬장 속에서 까치발 한 흰 먼지들, 언제 어디서나 부푼다 피란민 꿈속에서 앉은뱅이책상에서 깨금발 뛰던 푸른 먼지들, 마을버스에서 구멍가게에서 오늘도 구르며 집세를 걱정하고 곰팡이를 걱정한다 확, 걸레질로 닦아내도 다시 차곡차곡 내려앉는 저 기도들 걸레로 변신한다 닦아낸 자리마다 맴도는 저 신앙들 비딱한 봉창으로 변신한다 설화신궁 도깨비동자 용왕장군 아씨당 불사대신 천상선녀 작두장군 백궁거사 천궁도인 천상대감 이화보살 할매당 약명도사 애기설녀 흩어지며 뭉쳐지며 옹기종기 모여 앉는 탯줄..

한줄 詩 2021.12.20

고독사 - 이문재

고독사 - 이문재 눈이 오시려나 노인은 굽은 허리에 양손을 대고 한껏 날 선 능선을 바라본다 촘촘한 침엽수들이 잘 발라낸 생선 가시 같다 올려다보는 것이지만 뒤돌아보는 자세 햇살이 기우는 만큼 바람이 한칸 더 습해지고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안골에서도 골 끝 꼭대기 집 성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아궁이에 솔가지 가득 집어넣었는지 굴뚝 연기가 푸짐하다 안골 안쪽으로 솔가지 타는 냄새가 번져나간다 새끼 노루 쫓는 발걸음처럼 어둠이 잰걸음으로 골 안으로 들어선다 시린 눈 냄새가 타다닥 불 냄새를 와락 껴안는다 눈이 와서 사각사각 쌓이는 산골이 새하얗게 어두워진다 식은 밥 더운물에 말아 백김치 얹어 먹는 밤 대설주의보가 산맥의 동서로 길게 드리워진 밤 툇마루 바로 앞에서 길이 끊기는 밤 전신주가 띄엄띄엄 지워..

한줄 詩 2021.12.17

질문 빈곤 사회 - 강남순

묵직한 주제를 아주 명료하게 쓴 책이다. 이런 책을 읽으면 저자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한다.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책이기도 하지만 나와 생각이 같은 저자와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것이 더 큰 수확이다. 저자 강남순은 현재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다. 2017년 경향신문 선정 올해의 저자로 선정되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겨레와 경향신문 열독자여서 경향신문에 언급되는 저자를 신뢰한다. 맹목적은 아니다. 강남순은 페미니즘과 종교에 관한 책을 여럿 썼다. 좋은 책을 많이 썼음에도 그의 책은 처음 읽는다. 어느 한 꼭지도 버릴 게 없을 만큼 영양가 있는 책이댜. 일독해서 얻을 게 많은 가성비 갑이랄까. *문제는 거짓과 증오에 중독성이 있다는 점이다. 진실과 사실을 거짓과 선동적 ..

네줄 冊 2021.12.17

슬픔이라는 내용을 가진 한때 - 강재남

슬픔이라는 내용을 가진 한때 - 강재남 단단하고 헐거운 감정이다 일시에 터지는 빛이라는 거다 태양이 쓴 문장을 읽는다 흰 그림자를 가만히 본다는 거다 누군가 그리워하기 좋을 때다 골목 너머로 시간이 진다는 거다 울음 닮은 침묵이 골목에 박제된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과 약속을 한다는 거다 빛이 빛으로 환원되는 순간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익숙해지는 것들에 마음을 내려놓고 단단하고 헐거운 감정을 말린다 그림자의 휴식처를 궁금해 말아야 한다는 거다 가장 낮고 초라한 곳이어도 그래 그럴 때도 있지 담담해진다는 거다 훌쩍 자란 계절의 뼈를 만진다 제 색으로 눈물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거다 수선화 라일락이 지고 봉숭아 씨앗이 여문다 사람이 사람으로 되돌아온다는 거다 *시집/ 아무도 모르게 그늘이 자랐다/ 달을쏘다 내가 ..

한줄 詩 2021.12.16

꽃무늬 흉터 - 박지웅

꽃무늬 흉터 - 박지웅 서랍 안쪽에는 세상이 모르는 마을이 있다 속으로 밀어넣은 독백들이 저희끼리 모여 사는 오지 먼 쪽으로 가라앉은 적막에 새들도 얼씬하지 않는 바람마저 알아차리지 못한 그 외진 길에 편지 하나쯤 흘러들었을 것이다 서랍에 손을 넣으면 독백은 내 손을 잡고 아랫마을로 내려간다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종종 과일이 사라지는 것은 마을에서 손이 올라온 것 내가 먹은 그리움에는 왜 뼈가 나올까 누군가 파먹은 사람의 안쪽 가만히 문지르면 흉터는 열린다, 서랍처럼 가끔 그곳에서 곡소리가 난다 고백 하나가 숨을 거둔 것이다 부치지 못한 편지 밖으로 발을 내민 그리움 뼈만 남은 글자들이 꽃상여에 실려 거처를 떠난다,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모든 흉터는 눈뜨고 죽은 글자들 모든 꽃은 죽어서 눈뜬 글자들이다..

한줄 詩 2021.12.16

국도극장 - 전지희

잔잔하면서 울림이 있는 영화다. 흥행 때문인지 갈수록 영화가 자극적으로 흘러가는 시대에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시적인 작품이다. 법대를 나왔으나 만년 고시생으로 세월을 보내던 기태(이동휘)는 고향인 벌교로 내려온다. 고향에 왔으나 모두가 서먹하기만 하다. 엄마는 오직 형만을 챙기고 오랜 만에 보는 친구들도 대면대면하다. 모두들 법대 나왔으니 성공할 줄 았았으나 땡전 한 푼 없이 내려온 기태를 한심하게 바라본다. 생계를 위해 읍내 극장에 매표원으로 취직을 한다. 이 극장 이름이 국도극장이다. 전지희 감독이 서울 을지로에 있던 국도극장을 이곳에 소환한 것이다. 지방 소읍의 극장으로 어울리지 않지만 기태는 그곳에서 간판을 그리는 오씨를 만난다. 오랜 만에 만난 동창생 영은(이상희)은 가수 지망생으로 억척스럽게..

세줄 映 2021.12.15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 우대식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 우대식 지옥을 유예하는 꿈을 꾸었다 원한다면 다음 생애를 이어가며 지옥을 영원히 유예할 수 있다는 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영원 너머 한 번은 그곳에 가야 한다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지상의 소시민이 이렇듯 큰 생각을 하며 지옥 아래 마을을 떠돈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했다 추운 겨울 저녁 들기름 바른 김을 숯불에 굽던 옛집으로 돌아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싶다 오한 속에서 만나는 지옥의 야차(夜叉)와 일대의 싸움을 끝내고 오랜 잠을 자고 싶다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봉당에 켜진 알전구처럼 겨울날의 모든 저녁이 나를 기다렸다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허무의 주루(酒樓) - 우대식 봉황성 주루 난간에 자리를 잡고 한여름을 보낸다 휘황한 밤의 색(色) 연암이 ..

한줄 詩 2021.12.15

건강한 노인과 고단한 청년 - 정덕재

건강한 노인과 고단한 청년 - 정덕재 -청년을 우대하는 나라 새벽에 약수터 물을 떠오고 아침에 게이트볼을 치고 점심에 오첩반상으로 끼니를 때우고 30분 낮잠을 즐기는 게 건강비결이라는 여든일곱 살 장만득 씨는 예순 살에 퇴직하고 칠순까지 아파트 경비원을 지냈다 그 이후 17년 동안 돈을 벌지 않았고 중국집 우동 먹을 때 탕수육 하나 추가하는 연금생활자로 살아왔다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다진 장만득 씨가 버스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이십대 중반 청년 하나가 차에 오른 뒤 긴 한숨을 내쉬자 장만득 씨가 벌떡 일어나 청년의 손을 이끌고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혔다 등록금 절반은 본인이 벌고 아르바이트로 방값을 내는 스물다섯 살 정민수 씨는 서서 졸거나 의자에 앉아 자는 일이 빈번하다 여자 친구 김순미 씨..

한줄 詩 202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