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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가락지 - 육근상

달가락지 - 육근상 유품 정리하는데 흔한 금붙이 하나 나오지 않는다 자랑이라고는 웃을 때 살짝 보이는 어금니 금이빨이 전부였는데 그것도 몇 해 전 틀니로 갈아 끼워 오물오물 평박골 만드셨다 팔순에 손녀가 선물한 화장품도 새것으로 보아 바라만 보고 흡족해하셨나 보다 쪼그리고 앉아 호미질하는 것 좋아하시더니 꽃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을까 귀퉁배기 깨진 밥그릇에 심은 꽃잔디가 마루까지 뻗어 있다 헌 옷가지며 먹다 남은 약봉지 태우다 물끄러미 장꽝 바라보니 남루를 기워 입어 한껏 차오른 달이 가락지인 양 고욤나무 빈 가지에 걸려 빠지지 않는다 무르팍에 얼마나 문질렀는지 반질반질하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여우 - 육근상 ​ 정월은 여우 출몰 잦은 달이라서 깊게 가라앉아 있다 저녁 참지 못한 대숲이 꼬리 흔들..

한줄 詩 2022.01.15

미래의 나에게 말 걸기 - 김추인

미래의 나에게 말 걸기 - 김추인 -호모 커넥서스Homo Connexus 가까이도 멀리도 아닌 2040년쯤 그대는 나인가 나의 유사 종인가 황금비율 아니라도 낡고 삭아가는 대신 바꿔 끼운 관절과 치아 망막과 새 달팽이관으로 씽씽해진 그대를 봐봐 우리는 상상이 가는 대로 구현해 내는 호모 데우스 신의 격노가 도달치 않아 신의 역사를 대리하는 불안의 연대에 미리 끌어다 쓰는 미래도 미래지만 허물고 파고 제동 장치 없이 내달리는 우리의 내일이 겁난단 말이지 봐봐 자연의 불호령이 시작된 게야 벌레도 아닌 균사도 아닌 것이 알은 알인데 쥐뿔도 없는 것이 무수히 뿔난 알이라니 쯧, 놈은 기척도 없이 행성을 꽁꽁 묶는구나 함부로 나대던 나를 너를 격리 시키는구나 유령도시만 같은 텅 빈 거리의 적막 가운데 하늘 맑아지..

한줄 詩 2022.01.15

훌륭한 불행 - 박지웅

훌륭한 불행 - 박지웅 ​ 당신이 보내준 절벽 잘 받았어요 어떤 편지는 아찔하거든요 특히 마지막 줄은 기막히게 좋았어요 그 끝에 부들거리며 서 있다 밑으로 고꾸라지는 꿈을 꾸게 되었거든요 그곳에서 누군가 바위로 눌러놓은 봄을 보았어요 동고비 한 마리 깃 비비고 간 그늘에서 천둥소리가 태어나고 그 찢어진 틈으로 빗줄기들을 수레에 싣고 서쪽으로 다 옮기면 장마가 끝나겠지요 청춘은 성냥개비 같은 어깨를 가졌지요 스치는 대로 불이 붙는 곳이었지요 손짓 한번 조심스럽던 날들 이토록 감싸는 건 내게 당신이라는 훌륭한 불행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서쪽을 다 지나온 절벽들이 멈추어 선 곳 찢어 날린 편지가 저녁이 되건 눈보라가 되건 나는 몰라요 *시집/ 나비가면/ 문학동네 가끔 타지 않은 편지가 - 박지웅 산 자들이 쓰다..

한줄 詩 2022.01.12

자술서, 허리춤에서 꺼낸 한끗의 무게 - 송병호

자술서, 허리춤에서 꺼낸 한끗의 무게 - 송병호 목양실, 에어컨 실외기 커버 씌우다 얼핏 눈이 와도 올지 않을 빈집을 본다 성명 위 낙관처럼 각인된 故 질식사 사망 시간을 알 수 없는 끝내 깨지 못해 화석이 된 사란(死卵) 꼬리 긴 둥지 밟힐까 울음도 울 수 없었을 불법 입주 언제 비웠는지, 고요만 슳다 한 해 농사 놓친 힘듬이 느껴오는, 가까워서 너무 먼 빛과 어둠 사이 열대야 불면은 발등만 훑고 갔을 것이다 먹이사슬 윗선 고등의 무례, 피차 生의 平 같은데 여린 빗물로는 씻기지 않을 시월의 바람은 삭연하다 그때 나는 어디서 무엇으로 절반만 사랑하다가 꼭 마지막에서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침묵에 드는지 언젠가 헤쳐 갈 무풍의 돛이면 좋겠다 명년, 흙이 새살 돋는 잔설 몽진 다 털어내고 봄꽃 필 무렵 ..

한줄 詩 2022.01.12

비보호좌회전 - 복효근

비보호좌회전 - 복효근 알아서 가라는 뜻일 게다 보호해주지 않을 테니 책임지지 않을 테니 니 인생 니가 알아서 살라는 뜻 겁박이거나 책임회피거나 시험의 기미가 농후하다 이 땅에서 왼쪽은 언제나 위험한 곳 숟가락을 왼손으로 잡아들면 대가리부터 쥐어박혔다 반대차선에서 멀리 한 대 다가오는데 망설이자니 뒤차가 경적을 울려댄다 이건 자율의 뜻이라고 직진신호에도 좌회전할 수 있으니 허용의 뜻이라고 왜 매사 못 믿고 주저하느냐 한말씀하시는 것 같다 자율과 허용이 갖고 있는 몇 개의 함정을 나는 안다 직진신호에서 좌회전하다가 골로 간 사람 더러 있다 노조에 가입했다가 나는 좌빨 소리도 들었고 짤릴 뻔도 하였으니 외야의 좌익수마저도 불안해 보인다 어쩌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뒤로 저 애매한 시그널 앞에서 겁 많은 이 ..

한줄 詩 2022.01.11

대화 - 김진규

대화 - 김진규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가 구겨져 있다 다물어지지 않는 부리 위를 기어다니는 어두운 벌레들 작은 구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꺾인 날개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새의 몸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의 속을 채워보기 위해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를 한 번 밀어 넣어 보듯이 혼자 날아가지도 못할 말들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둥근 머리통을 한참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쪽의 눈과 저쪽에 있는 새의 눈이 마주치자 여태껏 맞아본 적 없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통이 간지러워져서 나도 어딘가 머리를 드밀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이곳..

한줄 詩 2022.01.11

생명 가격표 -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이 책을 읽으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가격표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알려준다. 저자는 보건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다.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득달같이 견인차가 먼저 달려온다. 그 속도는 경찰자보다 빠르다. 같은 직업이어도 얼마나 밥줄이 절박한가는 속도에 달렸다. 경찰이야 차분히 자기 할 일 하면 되지만 견인차는 경쟁자가 오기 전에 선점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고로 죽은 생명에도 가격이 매겨져 있다는 것이다. 노숙자가 다쳤거나 죽었다면 병원은 환자 받기를 거부하거나 서로 떠넘긴다. 생명이 위급한 것은 같은데도 그 사람이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생사가 갈린다. 하물며 가격표가 매겨진 현실은 오죽할까. 자본주의..

네줄 冊 2022.01.11

사람의 일이란 - 안태현

사람의 일이란 - 안태현 영덕에서 일출을 보고 오는 길에 삼중 추돌 사고를 당했다 당신은 새해 액땜한 셈 치자고 말했으나 나는 이 좋은 세상에서 때마침 오가는 일을 생각했다 먼 산에 흩날리는 눈보라 엉겁결에 얻어 입은 죽은 사람의 옷 한 벌 알몸에 걸치고 있었다 떠나본 일이 없는데 나를 여기에 둔 채 저곳으로 빠져나가 이마트 정육점에서 저녁에 먹을 고기를 고르고 겨울딸기를 먹으며 티브이 뉴스 속의 나를 구경한다면 밤의 심심함으로부터 후생이 시작될 것이다 고속도로에 낭자한 피 한 방울 없는데 타이어들이 슬금슬금 비켜 간다 나는 이미 피비린내다 나는 이미 끊어진 운명선을 쥐고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서 다정다감한 가장의 위엄을 잃었다 우리가 만난 건 몇십 년 헤어지는 건 찰나 나는 알 수 없는 냉정함 속으로 ..

한줄 詩 2022.01.09

바이러스 사회를 감염하다 - 남궁석

많은 공부가 되는 좋은 책을 읽었다. 거의 2년을 꼬박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에 시달리다 보니 이런 공부도 하게 된다. 보이지도 않은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지난 2년의 경험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저자 남궁석 선생은 농화학과 생화학을 전공했고 미국에 있는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일반인들이 어려워할 수 있는 내용을 아주 조리있게 잘 설명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백 년 전 유럽을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과 1980년 대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았던 에이즈 바이러스, 그리고 2년 전에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셋 다 사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바이러스다. 이전부터 있었으나 몰랐던 것을 발견해 이..

네줄 冊 2022.01.08

함몰 - 윤의섭

함몰 - 윤의섭 달력에 쓰인 일정대로라면 여행을 다녀왔어야 하는데 나는 떠나본 적 없다 다녀왔어도 잊어버린 것인지 눈에 찍힌 발자국이 다시 눈에 쌓여 지워지고 꽃잎 떨궈낸 자리에 새로 꽃잎이 피어나고 봉분 갓 올린 무덤을 풀잎이 뒤덮고 퇴적의 역사는 쉽게 발굴되지 않는다 옷을 껴입지 그래요 추운데 정말 거기 갔을지도 몰라요 모자를 쓰든지 우산을 써 봐요 이런 날 외출하는데 그럼 나는 얼마나 오래 삭제되어 있었던 건가요 사람들이 여행이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장례라고 말한다 대기권에선 늘 풍장 중인 달력에는 동그라미 표시한 날짜가 있다 여행이 끝나는 날이거나 떠날 날이거나 *시집/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절리 - 윤의섭 이 상태로는 오래 가지 못한다 내리는 눈과 눈 사이와 수직의 나무..

한줄 詩 2022.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