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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시림과 치 떨림 - 최준

발 시림과 치 떨림 - 최준 네 살을 기억한다면 아흔네 살을 기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첫사랑이 아프다면 마지막 사랑이 안 아플 리 없다 언덕에는 바람집이 있고 집주인인 바람의 발가락을 주무르는 하녀 안마사 나무가 있고 바람과 나무 사이를 통과하는 사람이 있다 발 시림과 치 떨림 그것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 네 살의 바람과 아흔네 살의 나무가 왜 함께 첫사랑을 아파하는지 마지막 사랑을 끝내 기다리는지 바람은 치를 떨고 나무는 발이 시리고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슬로비디오 - 최준 겨울 강가를 걷다가 보았다 머리 위 버드나무에서 날개 퍼덕이는 새 한 마리 앙상한 나뭇가지가 된 발목이 묶여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검은 비닐봉지 아, 알겠다 지난여름 한 때 강물이 그 높이로 흘러갔던 것 상류 어디..

한줄 詩 2022.01.07

가짜도 모르는 가짜뉴스 - 정덕재

가짜도 모르는 가짜뉴스 - 정덕재 -가짜뉴스박멸법 제정 밤이 아니라 낮이에요 가로등 불빛이 환한데 밤이라고요 누가 봐도 낮이죠 가로등이 졸고 있다고요 그건 김수희 노래에나 나오는 말이죠 가로등 아래에서 사람이 졸고 있다는 말이군요 2021년 6월 21일 저녁 10시 30분 대전시 오류동 우체국 앞에 있는 술집에서 취객이 가로등도 졸고 있다는 가수 김수희의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가로등이 깜박깜박 졸았다 '가로등을 졸게 만든 취객 알고 보니 김수희 팬' '가로등을 졸게 만든 한국전력 관계자 당직 중에 깜박 졸아' '가로등 아래 노상방뇨하던 시인 감전으로 졸도할 뻔' 가로등 아래에서 졸았을 뿐인데 가로등이 졸았을 뿐인데 가짜뉴스는 문맥이 끊긴 말줄임표 같은 점멸신호를 보내며 순간순간 거짓 구호를 만든다 가로등..

한줄 詩 2022.01.07

배심원 - 안은숙

배심원 - 안은숙 나는 마흔에 기소되었다. 배심원들은 내 마흔에 대한 죄목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나의 마흔은 죄지은 나이 투덜거림으로 식탁을 차려야 하는 지독한 권태, 그래서 난 낯선 밤을 사랑하기로 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을 켜고 외출에 몇백 명의 애인을 숨겨두고 싶었던 나의 마흔은 낯익은 사람들이 싫어지는 나이, 판결을 운운하던 날 보라색 속옷을 사들였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손톱을 물어뜯고 마흔 개의 꼬리를 단 나는 꼬리가 길어지는 이유를 자꾸 병원에 물었다 온갖 연령대들로 구성되어 있는 배심원들 그들은 내가 지나쳐 온 연령이거나 지나친 연령, 사소한 너는 그때 치마를 입지 말았어야 했어 줄 나간 스타킹을 돌돌 말지 않았어야 했어 종교에 귀의할 시간을 놓쳐버린 거야 의견은 달랐다 나는 ..

한줄 詩 2022.01.06

눈오는 들판에서 - 박남원

눈오는 들판에서 - 박남원 이승에서 살다 살다 해탈까진 못하더라도 먼지 때 묻은 마음밭 열심히 쟁기질하여 갈고 닦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눈 내려 수심 깊은 들길 한줄기. 우물물 길어 올리듯 세상 하나 길어 올리며 결국, 수많은 사람 중에 그대에게 가는 길. 가도 가도 길 아닌 길 위에서 길조차 눈이 되어 흩날리는데, 그대는 어느 심연의 바닷가에서 눈 내리듯 어디쯤 오고 있는가.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소한 추위 - 박남원 소한 추위에도 인부들은 인력사무실 기름 난롯가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피곤함과 초조함이 날실처럼 교차하는 이른 새벽. 얼룩진 페인트 벽 위로 흐릿한 형광 불빛은 밤 거미처럼 기어 다니고 연장 가방에 담긴 하루치의 연명은 한겨울 날파리처럼 가볍다. 기..

한줄 詩 2022.01.06

유시민 스토리 - 이경식

유시민이 쓴 책뿐 아니라 유시민이란 이름이 들어간 책은 가능한 읽으려 한다. 심지어 반대편 사람이 쓴 유시민을 비판하는 책도 읽는다. 한 사람에 꽂히면 그가 들어간 모든 매체를 탐닉하는 습관이 있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가 가슴에 들어오면 그 시인의 이전 글을 빠짐없이 찾아 읽는 편이다. 지독한 활자 중독자이기도 하지만 대충 읽기보다 철저하게 읽으려고 한다. 아마도 리영희, 신영복 선생과 함께 유시민도 나를 중독시키는 저자다. 그의 책이 어렵지 않게 읽히면서도 어디 가서 아는 체 하기 좋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작가 이경식이 쓴 유시민 평전이랄까. 아직 평전을 쓰기에는 유시민의 일생이 창창하지만 그래도 유시민이 걸어온 길을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 한 사람의 일생을 책 한 권으로 정의할 수는..

네줄 冊 2022.01.06

마침내 - 천양희

마침내 - 천양희 아침 바람은 가로등에 스치고 눈 내리는 날엔 풍경이 풍경을 본뜨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고 매일 실패하며 살기도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젊음은 제멋대로 왔다가 조금씩 물러나고 우리의 찬란이 세상 모르고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마음에도 벽이 있고 생각에도 동굴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닫고 살기보다 열어놓고 살기란 더 강력한 삶이라는 걸 알았을 때 세상은 살 만한 곳인가 묻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때 마음에도 야생지대가 있군, 중얼거리며 내가 마침내 할 일은 죽기 살기로 세상을 그리워해보는 것이다 *시집/ 지독히 다행한/ 창비 사소한 한마디 - 천양희 1920년 뉴욕의 어느 추운 겨울날 가난한 한 노인이 “나는 맹인입니다.” 잭은 팻말을 들고 공원 앞에서 구걸하고 있..

한줄 詩 2022.01.03

음식에 대한 예의 - 김승강

음식에 대한 예의 - 김승강 먹다 남은 음식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좀스럽다 하겠지요 바닥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는 개미도 먹고 진드기도 먹는다고 하셨죠 잔반은 개도 먹고 돼지도 먹는다고도 하셨지요 저는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버려지는 음식이 아깝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버려지는 음식이 안타까워요 버림받는다는 건 안쓰러운 일이죠 내가 거두고 싶어요 고아를 입양하듯이 버리려면 나에게 버려주세요 내 위가 음식물쓰레기통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내 몸이 음식의 고아원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상한 음식이 아니라면 저를 주세요 음식은 음식으로서 역할을 다할 때 음식인 거겠죠 그들의 역할이 다하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그게 나를 살게 하고 우리를 식구이게 한다고 봅니다 *시집/ 회를 먹던 가족..

한줄 詩 2022.01.03

꽃별 지다 - 김남권

꽃별 지다 - 김남권 한 사내가 죽었다 종각역 4번 출구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보신각 뒷골목에서 가로 육십 센티 세로 백육십 센티 빈 박스 속에서 마른 새우처럼, 최초로 엄마의 바다를 헤엄칠 때처럼, 잔뜩 웅크린 채 굳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그 앞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를 조문하지 않았다 또 다른 노숙자가 다가와 그의 안부를 물었고 곧이어 구급차가 나타나 그를 싣고 갔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삼십 년 전 종묘광장 벤치 위에서 잠을 청하고 서울역과 청계천 빌딩 숲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던 순간에도, 달방호의 차가운 물길 속을 걸어 들어가던 순간에도 그랬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저물어가도 되는 것일까? 조문도 없는 길 위에서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고 다시 새..

한줄 詩 2022.01.03

어른이 되기 위한 망각

*세련되게 거절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이 안면으로 일을 들이밀 때는 일단 생각해 본 다음 메일로 답을 드리겠다거나, 상사가 당직을 바꾸자고 할 때를 대비한 적당한 핑곗거리 정도는 만들어 둬야지. 곁들어 말한다면,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일은 경험에 비춰보건데 시작하지 않는 게 좋아. 일도 그르치고 인간관계도 불편해질 뿐이지. 기억해 둬. 거절을 잘하면 인생이 두 배는 편해진다는 것을, 가끔 인생은 결코 착하지 않은 나와 끝까지 착하게 보이려고 하는 나와의 끝없는 싸움이 아닐까 하는 우울한 생각이 든다. *최갑수의 책 에서 발췌 # 한 살 더 먹었네. 언젠가부터 이 말이 불편해졌다. 어릴 때는 어떻게 하면 빨리 한 살 더 먹고 어른이 될까 했다. 아마도 서른 살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열줄 哀 2022.01.02

눈 내리는 충무로 인쇄골목 - 전장석

눈 내리는 충무로 인쇄골목 - 전장석 첫눈이 왔을 뿐인데 쇄출기가 고양이 발걸음처럼 느릿느릿해지고 첫눈이 왔을 뿐인데 갑자기 허기가 져 순댓국에 소주를 시킨다 어쩌다 첫눈이 왔을 뿐인데 흐린 창밖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오래 서성이고 첫눈이 오자 인쇄골목 사람들은 그동안 망설이던 기차를 타고 고향의 설원을 향해 달리는 꿈을 꾼다 늙은 쇄출기가 밤새 콜록이던 골목골목에 아픈 상처를 더듬듯 눈은 낡은 입간판을 어루만지고 천막 위에 흰 천막을 덮는다 그곳에 맨 처음인 듯 쓰여진 눈의 마지막 문장에다 마침표를 찍으려 들뜬 사람들의 분명한 발자국이 지워지고 다시 찍히고 있다 어쩌다 첫눈이 왔을 뿐인데 늙은 암고양이 밤새 낡은 쇄출기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좌우 막힘없이 몸놀림 가볍던 지게차는 눈송이 하나에도 무..

한줄 詩 202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