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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 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 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나는 앞발로 툭툭 쳐보며 굴려보며 베란다 철창에 쪼그려 앉아 햇빛을 쪼이는데 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 꺼내놓고 보니, 내가 삼킨 새들이 지은 전생이로구나 나는 배가 쑥 꺼진 채로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점점 투명하여 밝게 비추는 이 봄 저 세상이 가깝게 보이는구나 평생을 소리없이 지옥의 내장 하나를 만들고 그것을 꺼내보는 일 앞발로 굴려보며 공놀이처럼 무료하게 맑은 나이를 보내어보는 것 피 묻은 그것 내가 살던 집에서 나와보는 것 너무 밝구나 너무 밝구나 내가 지워지는구나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문학동네 이 햇빛 - 이윤설 나에게 닿는 이 햇빛은 얼마나 멀리서 왔는가 이 빛의 실마리 끝을 잡아..

한줄 詩 2021.12.05

회복하는 인간 - 정철훈

회복하는 인간 - 정철훈 새벽 3시, 잠이 안 와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니 누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 같다 거실에 켜진 불이 후광이 되어 인체 비례가 선명하게 보였다 두 팔을 벌린 길이는 신장과 같다, 라는 비례를 통한 인체의 구조는 이 새벽에 두 팔을 벌린 길이는 슬픔의 크기와 같다, 라고 수정되었다 그게 아니면 그 시간에 담배를 빼물고 연기를 내뿜을 리 없다 그게 아니면 나 역시 왜 그 시간에 깨어나 당신을 보는가 캄캄해져야 시야의 회복이 가능하다면 극장에 간 횟수만큼 회복됐어야 했다 불이 꺼지면 회전하는 지구가 보이고 우주에서 날아온 유니버설 로고가 지구를 에워싸는가 싶더니 차르륵, 소리와 함께 필름이 끊겨버린 악몽 뭔가 잘못됐다는 이번 생의 오프닝 크레딧 지..

한줄 詩 2021.12.05

우리를 스쳐간 것, 우리가 스쳐간 것 - 강건늘

우리를 스쳐간 것, 우리가 스쳐간 것 - 강건늘 허연 쌀알 하나 서쪽 하늘에 떠 있는 저녁 한강변을 뛰다 길 한가운데에 멈춰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작은 여치 한 마리 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 낯선 땅 위에 서 있는 낯선 가느다란 초록색 다리 스쳐 지나가는 이 바람은 또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또 어디로 가는가 나는 여치의 생각을 똑같이 따라하고 스쳐 지나가려던 바람도 잠시 머뭇거렸다 며칠 뒤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여치는 짓이겨져 있었다 나비가 날던 곳 아이들이 뛰놀던 곳 여치를 짓누른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시집/ 잠만 자는 방 있습니다/ 달아실 나는 밤마다 별들을 걱정한다 - 강건늘 언제부터인지 나를 부르지도 않고 소식조차 없는 나의 작은 별들 가만히 보니 아물아물 앓고 있다 바들바..

한줄 詩 2021.12.02

별, 아버지의 침상 - 최규환

별, 아버지의 침상 - 최규환 별은 멀고 아득했다 가장 가까운 별이 4광년의 시간을 통과하여 눈에 닿았을 때 나는 그보다 먼 직선의 별을 상상했으나 이미 소멸된 화석이었으니 그리 오래된 일기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별이 통과하는 직선과 공간의 새벽에서 흐느적거렸다 고열이 시작되는 온도에 맞춰 빛은 방 안 가득 선명했고 숨을 오랫동안 지켜내고 있었다 별은 직선과 허공에서 수천억 광년을 거슬러 씨앗을 빚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얼룩이 찌든 침상에 누워 천명(天命)을 이룬 돌이 되어갔다 고름을 힘껏 쏟아내고 난 후 시간 밖에서 빛을 다듬었던 것이다 닿을 수 없는 행성 밖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천천히, 그리고 또렷한 화석이 되어 별의 화상(畵像)을 빚어내고 있었다 옥수수 껍질 벗기듯 아버지를 돌아 눕힌 ..

한줄 詩 2021.12.02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 정은정

지금 시대와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이 책 제목이 아니라도 처럼 다정하면서 한편 예리하게 박히는 문구가 있을까. 이 상투적인 제목을 단 책 속에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이 깊이 있게 담겼다. 그동안 신문에 쓴 칼럼을 모아 손질해 한 권으로 엮었다. 그래서 글 꼭지가 길지 않아 틈틈히 읽기에 좋은 책이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모습이 사라졌다.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세상이라 책 읽는 사람을 보면 되레 낯설다. 이 책은 어느 대목을 읽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짧지만 강열한 인상을 주는 글이라 지하철에서 읽기에 딱이다. 달달하면서 짧은 글은 SNS에 넘쳐난다. 그런 문장일수록 금방 휘발이 되는 반면 종이 책에서 읽은 문장은 오래 남는다. 한 문장 소개하자면 이라는 꼭지에 이런 글이 있다. 출장을 다니..

네줄 冊 2021.12.02

밀려난 것들 - 김주태

밀려난 것들 - 김주태 특별시에서 인구 십만 도회지로 밀려나 술잔을 채운다 족발 뼈다귀 뜯으며 빈 소주병 일으켜 세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노점상 아줌마는 자릿세 걱정이고 이 도시에서 조금만 고생하면 시의원 명함 하나 내밀 수 없겠냐고 안경 너머 불안한 눈빛 시베리아 어느 산등성이 얼음 같은 술잔을 부딪친다 찬바람 불고 눈보라 이는 겨울이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절룩이며 떠났던 땅 외발로 돌아온 네게 쏟아 붓고 싶은 말들 오물거리는 목구멍으로 따뜻한 어묵 국물 삼킨다 늦은 밤 구겨진 지폐 밤거리에 지불하고 돌아오는 길 무너진 담장 아래 고개 숙인 수국 기울어져가는 담벼락 구부러진 허리에 희미한 달빛이 붙어 있다 *시집/ 사라지는 시간들/ 삶창 간간이 벌어 근근이 살아간다 - 김주태 한파가 오면 긴 겨울잠에 ..

한줄 詩 2021.12.01

작위적이라는 방이 있었다 - 이은심

작위적이라는 방이 있었다 - 이은심 문을 두드린다 응답하지 않는다 안에서 밖을 잠근다 견디는 방식이 문제다 문을 연다 텅 빈 방이 방을 업고 나간다 못 견디는 방식이 문제다 독실한 내일에 월세를 지불하지 않았으므로 뺨을 지나 옷깃을 지나 한없이 빈곤한 고양이가 트럭 밑에서 비에 젖은 바닥을 꺼내온다 고양이도 생활고를 알까 모과를 떨어뜨린 나무와 아이를 놓친 창문과 종일 식탁보처럼 흘러내려서 백수인 거야 바닥을 다 울고 나면 울음은 또 어떤 바닥을 쳐야 하나 내일이라는 방을 예약하지 않고 갑자기 알게 된 슬픔 앞에 빈방만 놓고 돌아섰다 나도 내 젊음에 폐업 쪽지를 붙이고 싶을 때가 있었으므로 그 쪽지가 너풀거리는 곳에 흰 꽃 한 송이 두고 싶을 때가 있었으므로 *시집/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상..

한줄 詩 2021.11.30

오늘은 없는 날 - 김선우

오늘은 없는 날 - 김선우 ​ 아무것도 안 하는 중이에요 행복하고 싶어서 정치 마케팅과 상품 마케팅에 유혹당하지 않게 말 많고 현란한 매체들에 귀 닫고 눈 감아요 돈이든 권력이든 세력 불리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 필요와 정의 타령에 넘어갈까봐 하늘을 봐요 조용히 더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 눈 뜨니 오늘이 있어 없는 날이라 부르기로 해요 없는 날에 할 일은 바람 속에서 시집 몇 페이지를 천천히 읽고 아침과 저녁의 산책을 출생 이전처럼 하는 것 지구가 우주의 일원으로 오늘을 걷고 운 좋게 지구에 탑승한 오십년 차 승객인 나도 지구와 함께 걸어요 지구 입장에선 자갈돌 하나인 나 우주의 입장에선 티끌 한 점도 안 되는 나 이토록 작은 존재에 허락된 하루를 오직 감사하면서 오늘은 없는 날 행복하고 싶어서 구름 버튼..

한줄 詩 2021.11.30

순간의 바깥 - 이문희

순간의 바깥 - 이문희 내가백합과 목련의 다름을 인정해서 겨울이 왔다 푸른 초원이 펼쳐진 사바나를 구글에서 검색하다가 검은 기린 흰 기린을 처음 보았다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 끝 적도에는 아까시나무와 바오바브나무가 보인다 한 여자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마당엔 빨래가 깃발처럼 펄럭인다 향기로운 꽃들이 피었다 지는 사이 사랑의 중심엔 커피가 끓고 있다 침대 모서리엔 남자의 파자마가 걸쳐 있고 어젯밤 쓴 시가 화장대 위에 반쯤 구겨져 있다 검은 기린은 얼마나 고민이 많아 검게 되었을까 왜 나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다시 봐도 검은 기린은 나 같고 흰 기린은 너 같은 나를 꼭 닮은 검은 기린을 생각하면 겁 많은 눈으로 멀리 표정을 살피다 물기 젖은 나뭇잎을 먹고 속눈썹에 잠이 맺혀 별을 당긴다 너를 닮은 흰 기..

한줄 詩 2021.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