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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라는 말 - 이현승

바닥이라는 말 - 이현승 우리들의 인내심이 끝난 곳. 사는 게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묻고 싶은 사람들은 하늘을 본다. 별 볼 일도 없는 삶이라서 별이라도 보는 일이 은전처럼 베풀어지는 거겠지만 사람이란 후회의 편에서 만들어지고 기도의 편에서 완성된다고 할까. 부드럽게 호소해도 악착스러움이 느껴지는. 그 많은 간구의 눈빛과 목소리를 신은 어떻게 다 감당하고 있는 걸까. 콩나물처럼 자라 올라오는 기도들 중에서 제 소원은요 다른 사람 소원 다 들어주고 나서 들어주세요. 하는 물러 빠진 소원도 없지는 않겠지만.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선 곳 그러니까 풍문과 추문을 지나 포기와 기도를 지나 개양귀비 뺨을 어르며 불어오는 바람이 가까운 진흙탕 위로 내려앉는 것을 본다. 아무리 맑은 우물이라도 바닥사정은 비슷하다. 그러..

한줄 詩 2022.01.02

잘 가라, 나쁜 년

# 참으로 징글징글한 코로나 시국이다. 난데 없는 전염병으로 일상이 망가진 지 어느덧 2년이 다 돼간다. 처음엔 몇 달 고생하면 괜찮아지겠지 했다. 그 암흑 같은 1년이 지나고 2021년, 올해는 괜찮아질 거야 기대를 했다. 그러기를 또 다시 1년을 보태 2년이다. 이렇게 길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며칠 전, 세 번째 백신 주사를 맞았다. 일명 부스터 샷이라는 3차 접종이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2차 맞은 지 딱 90일 째에 맞았다. 다행히 여태 코로나 안 걸리고 지나왔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난 2년 동안 여행 한 번 제대로 가보질 못했다. 떠돌아다니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오죽하겠는가. 목줄 없이 풀어 놓고 자란 강아지가 목줄 못 견디는 것처럼 말이다. 11월 들어 시행한 위드 코..

열줄 哀 2021.12.31

목구멍 - 우혁

목구멍 - 우혁 세상의 모든 병(甁)에서는 비슷한 맛이 난다 차마 울 수도 없던 묵직한 것이 가래처럼 버티고 있다 그들은 영혼이 목구멍 속에 있다고 믿었다 마음은 목구멍 속에서 기도와 식도를 넘나들고 침을 삼킬 때 울컥하고 밀려오는 건 너의 오래된 슬픔 고삽(固澁)의 모양새대로 넌 울 때조차도 목구멍을 벗어날 수 없어 먼지 맛이 나는 어제 우린 늙는다 허나 줄어들지 않는다 그 반복, 나는 분명 너라고 하나밖에 없는 목구멍으로 발화한다 타들어가는 말은 경계에서만 뜨겁다 나의 존재가 시간과 반비례 관계는 아니란 거 어쩜 우린 지독한 영생을 누릴지도 모른다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발바닥 - 우혁 알고 있었지, 알고 있었어 꽃은 피고 지고 더 이상 머무르지 마라 길은 나를 알고 있었고 나는 모든 길 ..

한줄 詩 2021.12.31

오고 또 오는 - 이은심

오고 또 오는 - 이은심 우주의 질량은 변함이 없다니 먼지의 총량을 쓰윽 닦아내는 무릎의 수고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울음도 가만 두면 썩을 것인가 번번이 옳은 청소도구와 올바른 물걸레가 첫눈 같은 얼굴로 쓸어내는 오고 또 오는 불화의 장르들 내 지옥도 조금씩 버리면 덜 아팠을지 몰라 수박은 씨를 아무 데나 뱉는다 어디서든 불어닥치는 생이 앞치마를 벗어 터는 곤한 저녁에 안주인이란 식후에 창문을 넓게 열고 새 수건을 갈아주는 사람 물로서 물을 씻어 먹는 결벽증은 밖을 묻히고 오는 강아지를 하얗게 빨아 널 텐데 시계가 시간을 떨어뜨린 곳 싸리꽃 흰 빛 다투던 곳 헛되고 헛되니 나는 발작적인 결백에 전염되었는지도 모르는 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든 훌훌 사라진 다음이란 마음껏 닦아 세운들 꽃바람일 리 ..

한줄 詩 2021.12.30

당부 - 김용태

당부 - 김용태 오래 전 사진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등에 걸린 책보가 위태롭구나 밀린 육성회비를 채근하던 선생님, 궁핍한 생활도 체념하듯 원망 않던 순한 아이야 물려받은 크레용으로 회색 하늘을 그려야 했던, 너는 다행히도 아직은 허리 굽은 부모를 가졌구나 오늘은 고단한 너를 위해 먼 훗날 네 여자를 시켜 변변치 않은 찬이나마 더운 밥을 준비 하마 철없는 새끼들 가꾸며 힘써 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만 겨우 허기 달래 줄 살림으로 저녁상을 마주했구나 그렇게 뒷날 네가 나를 살 때 어려 그렸던 꿈마저 펼쳐 주지 못한 채 이 모습으로 너를 맞게 되었으니 염치없는 일이다만 내민 손을 잡아다오 두려워하지 말고 머뭇거리지도 말며 운명인 양 걸어서 와 다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나이테에 ..

한줄 詩 2021.12.30

13월의 달력 - 임경남

13월의 달력 - 임경남 더는 갈 데가 없는 13월의 달력은 냉골이다 일마저 끊긴 겨울에는 말이 입안으로 말려들어가 목소리까지 증발해버린다 나는 수취인불명 식은 텔레비전은 혼자 놀고 전화기는 손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인기척이 졸아든 집에 행주는 비틀린 채 말라가고 달력의 표정은 똑같다 오래 전에 탕진해버린 젊은 날 파산한 추억은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납작하고 흔들리며 가는 독거는 갈아입을 감정이 없다 어떤 부호도 와서 같이 살지 않은 탓이다 누구에게도 번지지 못하고 봉지처럼 캄캄해지느라 희망의 패를 놓친 사적인 백산빌라는 한 켤레의 어둠을 신고 끈질기에 나를 찾아오는 것인데 *시집/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 북인 이명(耳鳴) - 임경남 이명은 빵 속에 빵이 사라진 난처함이다 뿌리는 어디에 걸어두..

한줄 詩 2021.12.29

흔한 낙타에 대한 - 김미옥

흔한 낙타에 대한 - 김미옥 햇살을 등에 꽂고 낙타가 걷는다 무심히 혀로 콧구멍을 핥는다 나는 편안히 앉아 익숙한 비애를 본다 와이드 화면 속 모래바람은 회오리치고 열 받은 팝콘은 지리멸렬 터진다 낙타는 우스꽝스럽게 울지만 눈물을 저장해 놓고 가볍게 씹는 법을 안다 단내가 화면 밖으로 품어 나온다 지긋이 눈뜬 낙타의 검은 망막에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뜨거운 혹 만년을 이고 다녀도 긴 눈썹 한번 깜빡이면 화면이 바뀐다 마른 오아시스에는 오늘도 불굴을 되새김질하는 흔한 낙타가 있다 *시집/ 탄수화물적 사랑/ 한국문연 정치적인 아버지 - 김미옥 엄마가 밥 먹으러 간 사이 병원에서 혼자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 죽음은 객사일까 아닐까 '네 엄마 얼른 오라 해라' 전화기 건네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삼팔따라지 박..

한줄 詩 2021.12.29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전혜원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 사전이 그리 정의할뿐더러 현실에서도 그렇다.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에서 ‘사람의 가치’는 그가 가진 ‘노동의 가치’와 연동된다.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좌우하는 것은 개인의 노동에 매겨지는 가치(임금)다. 값비싼 노동자일수록 촉망받는 인재로, 각광받는 결혼 상대자로, 존경받는 부모로 살아가기 쉽다. 반면 노동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저임금 노동자, 나아가 실업자는 최소한의 권리와 존엄조차 누리지 못할 때가 많다. 이 책은 노동력을 사람의 가치로 환산하는 오래된 현실이 합당한지에 대해 애써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크고 머나먼 차원의 일이다. 대신에, 좋든 싫든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 일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주목한다. 요컨대 이 책은 플랫폼 노동에..

네줄 冊 2021.12.29

행성이 몇 번 깜박거려도 - 이정희

행성이 몇 번 깜박거려도 - 이정희 붉은 계양대에 따개비 같은 바람이 잔뜩 붙어 있다 아무리 떼어내도 달라붙는 난폭한 바람 물밑을 알리는 부표 몇 시간을 달려온 어선들의 종착점, 어떤 파도도 물기둥에 떠 있는 아버지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중력을 만나야 무게가 생긴다는데 천적 바람과 주거니 받거니 실랑이를 벌여도 침몰하지 않는다 수평선에 더듬이를 세우고 마치 외계 같은 밀봉 속 그는 고요하다 몇 번 크게 들이마신 결심인 듯 단숨에 들이킨 심호흡같이 새어 나간 적 없는 공기가 깊고 깊은 물속을 수면 위에 올려놓고 배를 기다렸던 것이다 결심을 쉽게 풀지 않는 부표는 섬광 반짝이는 칠흑의 바다를 돌본다 물때만 끌어안는 굳건한 약속 어떤 폭풍에도 물밑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짭조름한 양수에 등을 대고 바다 안쪽의 ..

한줄 詩 2021.12.28

그 나무는 이미 - 박인식

그 나무는 이미 - 박인식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죽어 지냈기에 숨죽여 나를 죽여왔으면 보다 못해 그 나무가 먼저 죽었을까 탁- 찰나의 삶을 죽음의 영원으로 꺾어 자신의 죽음 앞에 이미 와 있었던 내 죽음으로 데려가 지옥에서 보낸 랭보의 한 철보다 어느 날 산에서 영원으로 꺾어진 내 첫사랑의 스물두 살보다 죽음에서 보낸 내 여름 한 철 *시집/ 내 죽음, 그 뒤/ 여름언덕 즐거운 오타 - 박인식 방랑보다 황당한 인생은 없다던 내 방랑인생의 황당을 방랑보다 황홀한 인생은 없다, 는 황홀로 바꿔놓고 운전면허도 차도 없이 음주운전하는 음주시인을 음유운전하는 음유시인으로 가꿔놓고 산을 첫사랑한 산벗이 산벚꽃으로 진 슬픔을 산벚꽃 산에서 지다, 로 은유하더니 이라는 이번 시집의 원제도 로 고쳐 죽음까지 살아서 즐기..

한줄 詩 2021.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