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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한 끼 - 박경은

며칠 전부터 올 한 해 읽으려고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쌓인 책을 정리했다. 매일 매일이 새날이고 기념일이라 여기면서 살지만 한 장 남은 달력은 늘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대책 없이 책 욕심만 있어 사들이는 습관은 어쩔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면서 옷이나 신발 등 꼭 필요한 물건 외에는 사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있는 것은 버리고 가능한 사지 않는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올해 못 읽은 책은 내년에도 못 읽기는 마찬가지다. 자꾸 읽고 싶은 신간이 쏟아지는데 밀쳐둔 묵은 책에 손이 가겠는가. 미니멀리즘 실천의 제 1의 덕목은 을 믿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는 필요하겠지, 읽겠지, 입겠지, 쓰겠지를 과감하게 잘라내면 실천할 수 있다. 가능한 사지 않고 나중 도서관 이용해야지 했다가 ..

네줄 冊 2021.12.12

찾아온 아이 - 김진규

찾아온 아이 - 김진규 그 먼 옛날 죄가 크면 발을 자르라 했다 그리하여 나는 발 없는 자의 무릎을 떠올린다 가장 낮은 자세로도 갈 수 없는 목소리 앞 왕의 광장이 넓게 펼쳐진다 그 먼 옛날 다툼이 있으니 가두라 했다 세상은 밤이 되고 밤은 피부가 되었다 깜깜한 배고픔 위로 뼛조각 같은 별이 부서졌다 먼 곳에서 지켜보는 왕의 관음을 생각한다 보이지 않던 죄가 왕에게 가면 거울처럼 빛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왕을 훔치고 싶었다 굽혀지지 않는 무릎을 가지고 싶었다 바퀴로 세상을 밀어내던 시절에 걷지 못해 낮은 자세로 기어다니던 날들 죄를 짓지 않았는데, 그랬던 것 같은데 내 다리에 모르는 별들이 한참을 돌아나갔다 그 먼 옛날 거짓을 말하면 혀를 태웠다 부모를 위로하면 그 밤엔 혀가 타들어갔다 왕의 혀는 가..

한줄 詩 2021.12.12

잊힌 것들에 대하여 - 송병호

잊힌 것들에 대하여 - 송병호 점점 단단해지는 풋것들로 여름이 출시된다 주 종목은 목줄에 매달린 KF94 마스크 콧등에 걸치고 간다 챙 모자를 치키고 이마를 훔치고 호흡을 고르고 백사장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손 선풍기와 리조트분양광고가 활활 타는 플라스틱 부채 하얗게 절인 눈썹 선의 간기 파도를 건너온 네 별 내 별의 원자재들이다 시인의 시중을 돕던 하청업자였다 올여름 휴가는 남도 다도해 허풍일수록 볼륨을 높이는 법 에어컨 콘센트를 분리하고 초인종을 잠그고 1000cc 키를 꽂고 휴대전화 카카오 내비 검색기를 틀고 새벽을 젖히자 전조등에 달라붙어 실신한 하루살이의 헝클어진 붉은 입술 바퀴벌레가 라면 국물에 빠져 죽었다는 그 민박집, 시치미를 뚝 떼고 있네 허름한 재고가 출시된 여분 흠집을 모아서 질 좋..

한줄 詩 2021.12.11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워 - 이현승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워 - 이현승 극빈이 스케일로 오해되는 순간이 있다. 힘없는 사람들이 권세에 연연하지 않는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황금을 돌 보듯 한다면 우리는 낮은 연봉에는 불만이 없지만 우리에 대한 대우가 그렇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공익성이라는 말의 뜻을 내몫은 얼만가로 이해하는 당신 앞에서 화딱지가 그것도 미역처럼 끝도 없이 올라오지만 극빈이 스케일이 되는 순간이 있다. 곗돈 떼인 박씨가 한바탕 울화를 쏟아내고는 꼭 그 인간이 오죽했으면 그랬겠냐고 그 인간이 그래도 우리집 큰 놈 낳을 적에 미역에 소고기 끊어 왔던 사람이라고 두둔할 때 성자들이 청빈의 접시 위에 말씀으로 영혼을 살찌우듯 없이 살아와서 가지는 것의 짐스러움을 멀리 한다거나 요강이나 재떨이도 영물처럼 여기는 마음일 때가 그럴 ..

한줄 詩 2021.12.10

나는 행인 3이다 - 김추인

나는 행인 3이다 - 김추인 -호모 사피엔스의 幻 여기는 다중 우주, 다중의 내가 포착되는 교차로다 틀림없다 저 뒤태의 낯익음 민망스럽고 들키고 싶지 않은 저 어정쩡한 면상의 각도 나의 행색을 패러디한 나의 면상에 환을 친 그가 광화문을 횡단하고 있다 발밑에, 출구 없는 동굴이 있을 것이다 입구는 멀고 출구는 지난해야 한다는 그래서 문은 늘 손닿지 않는 아득함이 덧쌓인 그리움일 것 언젠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문을 따고 들어가 그 생각의 행간에 마땅치 않은 내 사유물을 접어 넣었음에 틀림없다 저 우그러진 표정 뒤에 내가 숨어 있음이라는 유추성 판단이 조립되는 것만 봐도 기시감의 골목, 솟을대문 앞이다 쫄바지를 입은 6살 상고머리 아이의 낯짝은 닫힌 문 안인지 내내 뒤통수뿐이다 시간의 세포들 매 순간 찌들..

한줄 詩 2021.12.10

빠진 나사 - 김승강

빠진 나사 - 김승강 나사가 하나 방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어디서 빠진 놈일까 빠진 나사를 주워들다 말고 엎드려 장롱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동전이 몇 닢 떨어져 있다 동전은 언제부터 저기 있었나 내가 모르는 새 뭔가 은밀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불안하다 아직 일상은 별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다 나사 하나를 잃은 그는 자기 몸에서 나사가 하나 도망갔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알게 된다면 일상은 어떻게 변할까 불안했던 이유를 알겠다 빠진 나사 때문이다 빠진 나사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길바닥을 유심히 살펴봐라 집을 뛰쳐나온 개들이 길거리를 몰려다니듯 빠진 나사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다 드디어 저녁 뉴스 자동차가 한 대 길 위에서 찢어졌다 빠진 나사 때문은 아닐까 제 자리를 찾아주려다 포기하고 던져버린..

한줄 詩 2021.12.09

그렇게 아슬하게 - 박남원

그렇게 아슬하게 - 박남원 어떻게 살았겠는가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런 힘겨운 이야기들. 도무지 알 수 없는 질문과 대답을 뒤로 하고 술자리도 파한 자리 나는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엔 퇴로 없는 쓸쓸한 내 옥탑방으로 귀환하게 되지. 지독한 몸살 기운으로 비틀거리는 나를 후미진 골목까지 따라와 마지막까지 애써 배웅해주던 아슬아슬한 저 가로등 불빛. 그 불빛마저 뒤로 하고 텅텅거리는 외부 철계단을 거슬러 올라 싸늘한 냉기 감도는 방바닥에 발을 들이면 살아도, 살아도 결국 이곳은 이방인의 낯선 자본주의였다.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 이야기들. 그래도 못다 한 말들은 어쩔 수 없이 밤하늘 먼 별들에게 돌려보내고 언제나 뒤에 남겨진 채 버텨보지만 숱하게 넘어지고 쓰러지는 일이 늘 있는 우리의 일..

한줄 詩 2021.12.09

밥숟가락에 대한 단상(斷想) - 김용태

밥숟가락에 대한 단상(斷想) - 김용태 운명이라는 게, 늘 과녁 한가운데로 날아가 박히는 화살 같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재주 비상하여 삐져나오던 발톱 애써 감추고 묵묵히 뿔 벼리어 날을 세우던 친구가 뜻 이뤄 법복을 입게 되었다는 소식 전하더니 어느 날 중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게 3년쯤 전이다 퇴근길, 동창한테서 전화가 왔다 왜, 거시기 박사 있잖냐, 판사하다 중 된 갸가 오늘 아침 밥 숟가락 놨다고 하더라 도저히 이 세상 하고는 안 맞았는게벼 그날 저녁 꾸역꾸역 밥을 넘기며 드는 생각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산다는 건 결국 손목 들어 입(口) 봉양하는 일, 숟가락 꽉 잡고 놓지 않는 일 아닌가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시립 병원에서 - 김용태 혼자 사는 친구가 입원한 병실을..

한줄 詩 2021.12.06

한끗 - 이정희

한끗 - 이정희 공중이 휘어지면 계절의 한 부분이 꺾인다 휘어짐의 끝은 붉게 익은 홍시 몇 개 달려 있는 것 높은 곳의 가지를 휘는데 튕겨나가며 잘 휘어지지 않는다 그건 감 몇 개를 지켜내겠다는 나뭇가지들의 완고한 힘이다 그들만의 반경이고 외침인 것이다 높은 것들은 다시 높은 것들이 와서 먹겠지만 허공은 한 번의 그 빈자리를 망각한 적 없다 잡아당겼던 힘으로 겨우 이파리만 훑어 민망한 적 있다 나뭇가지들은 휘어지는 일로 얼마나 자신을 증명해야 할까 무수한 사이와 간극에 함몰된 긴장을 허공으로 튕겨 내려했을까 불안의 간격 그 갈라진 틈 사이 한끗으로 비켜간 안도가 수북하다 끝까지 지켜낸 것들은 결국 바닥의 것이 되겠지만 휘고 또 휘어지더라도 지켜내고 싶은 생명이 있다 *시집/ 꽃의 그다음/ 상상인 꽃의 폐..

한줄 詩 2021.12.06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 이태겸

보는 내내 마음이 답답하다가 먹먹하다가 했다. 영화는 한국 사회의 부당한 노동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원청과 하청의 수직 계약 관계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 갈등, 직장 내 성차별 등까지 다루며 노동자 연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정은(유다인)은 7년 동안 다니던 회사에서 하청 업체로 파견 근무를 명령 받는다.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퇴사하게 만들려는 회사의 목적이다. 송전탑을 관리하는 섬에 도착한 정은은 그곳 소장과 직원들의 냉담한 대우에도 이를 악물고 버틴다. 해고는 곧 죽음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얼마 못 버티고 떠날 것으로 생각했던 하청업체 노동자 충식(오정세)은 조금씩 정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엄마 없이 세 아이를 키우는 충식은 대리 운전과 편의점 알바까지 하며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가장..

세줄 映 2021.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