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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디딤, 혹은 매혹에 대하여 - 손진은

헛디딤, 혹은 매혹에 대하여 - 손진은 같이 가던 아이가 앞쪽 가리키며 손을 잡아 끈다 햇볕에 불 붙은 채로 바람의 장단에 기우뚱거리는 날개를 향해 발꿈칠 들 때 손끝에 모이는 시간 허나 미세한 조각 떨어져나간 날개로 정물이 되어 있는 잠자리 서리에 갇혀 있는 몸속에서도 생명의 형상을 품어 따스해진 죽음처럼 무게 드리우지 않고 죽음으로 걸어간 삶처럼 어쩌면 그 틈새에서 풍요로워진 생명 생이 미망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걸 우린 미망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미망을 찢으며 잠자린 햇살 가운데 날개를 두리우고 있었다 다른 이의 눈길이 빚어낼 빛나는 미망, 헛디딤의 실감을 위해 잠자릴 떼어내려던 손 슬쩍 끌어냈다 *시집,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문학동네 노인들 - 손진은 붙들려본 적 있으시..

한줄 詩 2018.03.19

어디에서 오는가 - 박순호

어디에서 오는가 - 박순호 나도 어쩌지 못하는 야릇한 기운이 몸을 지배하는 날이 있다 관절에 숨겨놓은 달빛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손아귀 광기에 사로잡힌 핏발선 눈동자 고통 같기도 한 통증 같기도 한 어디에서 어디까지 어느 마디에서 어느 마디까지 딱히 집어낼 수 없는 통증 모른 척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하다 그것은 내 의식과 무관한 보폭을 유지하지만 한 마디도 물을 수 없다 대부분 가장 어둡고 습하고 공허 속에 놓여있을 때 내 어깨를 두드릴 확률이 높다 누구의 가슴을 통해서 내게로 왔는지 어떤 통로를 경유해서 날아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가슴을 파내고 심어놓은 첫 줄처럼 *시집, 승부사, 애지 희망도 계급이다 - 박순호 나는 자주 당신의 계급을 잊어버린다 국가에 소속된 희망은 광장의 촛농으로 굳어가고 일 년 내내..

한줄 詩 2018.03.19

소를 모는 노인 - 김유석

소를 모는 노인 - 김유석 외딴집을 감고, 고구마순처럼 뻗친 길섶에 소똥 몇 점이 떨어져 있다. 굳은 몸을 푸는 연한 힘, 그것을 발에 묻히고 걸어간 봄은 냄새가 좋다. 삶은 고구마 같은 등성이, 외딴집에서 거기까지가 노인의 길이다. 평생을 오갔어도 항상 초행인 노인의 마음만큼 밑드는 고구마밭이 있다. 무엇을 앞세운다는 건 그것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큼이나 정겨운 일이다. 따라가는 길도 문득 홀연해질 때 슬그머니 돌아다봐 주는 눈빛, 무엇엔가 등을 맡긴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길들여짐은 없다. 내외하듯, 여물을 먹는 소의 잔등에 담배를 물고 돌아앉은 노인의 허리가 겹친다. 닮은 것들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도 서로의 몸에 마음을 드리우기도 한다. *시집, 상처에 대하여, 한국문연 야생화 - 김유석 꺾..

한줄 詩 2018.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