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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낮은 지붕의 기억으로 - 박인숙

그 겨울 낮은 지붕의 기억으로 - 박인숙 어둠을 향한 성급한 질주가 목이 메이도록 두려워 질 때 더는 가벼워 지지 않는 한 순간의 숨이 굴욕적으로 느껴질 때 그곳으로 갔었다 담장 밑에 웅크리고 앉은 낮은 지붕의 작은 성에선 감귤색의 불빛이 새어 나와 지친 발목의 뻑뻑한 허기까지 슬며시 휘감아 주곤 했었다 피지 못한 청춘의 혈흔을 돌보며 그 많은 우회와 그 많은 좌회를 맑은 소주의 흔들림으로 펴내면 아득한 절망도 잠시 둥글어 지곤 했었다 시간이 빼앗아 간 신데렐라의 무도회처럼 잡은 손이 공허해져도 이상하게 슬퍼지지 않던 그 성을 빠져 나와 오른발이든 왼발이든 내딛어야만 했던 나는 무거운 질주가 두려워 체한 어둠을 게워 버리곤 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겨울 낮은 지붕 안에서 절망과 나누어 갖던 투명한 ..

한줄 詩 2018.03.21

혜성의 꼬리가 돛을 올릴 때 - 김익진

혜성의 꼬리가 돛을 올릴 때 - 김익진 혜성의 꼬리가 돛을 올릴 때 웅장한 마음으로 짠 입술을 지우세요 창백하고 시시한 순간들은 지진에게 맡기고 불운한 출생을 잊으세요 인생의 단계가 바뀌고, 멜로디가 낯설어도 상심의 비명을 인정하세요 신들의 의지와 지혜는 예측할 수 없지만 노래와 춤이 우주를 따뜻하게 합니다 매일 밤 눈물이 뺨에 떨어지더라도 미소 지을 방법을 찾으세요 그리고 누군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말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지구도 당신의 심장 박동에 맞추기 위해 천천히 부드럽게 돌고 았습니다 납치된 입에 키스로 독이 채워질지라도 웃음만이 유일한 해독제입니다 악마보다 성경을 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인생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판타지이니 마지막 날까지 우주의 신비를 열지 마세요 신은 잠시 악과 친했던 우리를..

한줄 詩 2018.03.21

나이테 - 이강산

나이테 - 이강산 간판 찌그러진 식당이라면 어디를 가든 목소리만 들어도 주인 여자의 나이테가 그려진다 얼굴이 쥐 파먹은 고구마껍질 같어, 원 없이들 잡숴.... 어떻게 꽃 피고 단풍 들었는지 알 만하다, 몸통 어디쯤 벌목당했는지 상처가 깊은지 아물었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이테가 기울었는지 너희도 자궁 들어내고 집 떠나봐라 고향이 뭔지 새끼가 뭔지 생각이 뒤집힐 것이여.... 모란시장 변두리에서 삼겹살불판을 닦던 큰누님처럼 그 여자, 생의 절반쯤 떠돌았을 게다 알 만하다, 어느 골목엔가 잘못 들어섰다가 양철지붕 고드름이나 찢어진 봉창 따위를 발견하곤 갈 길 놓치고 오늘까지 눌러앉았을 게다 *시집, 물속의 발자국, 문학과경계 근시 - 이강산 간판의 글씨들이 먼 산처럼 흐릿하다 먼 산만 바라보고 살아온 듯한 하..

한줄 詩 2018.03.21

무반주의 사랑은 쓸쓸하다 - 김이하

무반주의 사랑은 쓸쓸하다 - 김이하 나는 사랑을 연주하지 않겠다 가슴 깊은 곳엔 아직도 뒤틀린 악기 하나 여치 집에 갇힌 여치처럼 푸른 울음을 뜯거니 언제나 폭풍 전야 같은 바람 없는 날들 끕끕한 삶들이 짓물러 오는 장마 끝의 날들 그게 언제인데 아직도 그런 날들이 내 가슴 속에 처박혀 있는가 아아, 나는 노래할 수 없다 간간이 신경 마디에 부딪쳐 아프게 우는 무반주의 사랑은 죽음보다 싫어 또한 사랑 없는 삶은 더욱 싫어 하지만 나는 노래하지 않겠다, 장마 끝의 날들 그게 언제인데, 그게 언제인데 새 풀잎 위에 새 바람이 불어도 나는 너를 연주하지 않고는,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내 마지막 삶을 연주하지 않겠다 가슴 깊은 곳엔 노래 잃은 악기 하나 여치 집에 갇힌 여치처럼 푸른 울음을 뜯거니 언제 폭풍 전..

한줄 詩 2018.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