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쉰... 남자 - 고운기

마루안 2018. 3. 20. 18:49



쉰... 남자 - 고운기



서둘러 갤러그를 맨 먼저 떼던 열일곱
서둘러 당구를 맨 먼저 떼던 스물
서둘러 골프를 맨 먼저 떼던 서른
........
이제는 슬슬 애인을 데리고 나오는 나이


문상 가서 장례 절차를 눈여겨보고
적금보다 통장에는 현금을 모으고


임플란트와 허리 디스크와 고지혈증을 체크하는 나이


입만 살아서 뭐든 말로 대신할 궁리 하는 나이



*시집,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 문학수첩








밤의 검침원 - 고운기



-바나나가 귀할 때였어요
막내가 독감으로 고생하고 있어서 바나나를 사 들고 집에 왔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먹기 싫어, 먹고 싶을 때는 안 사 주고....


이 집 막내의 막내 아이는
바나나가 지천이어서 이런 말도 모를 것이다


-중학생 때였어요
장군의 아들인 친구 생일 파티에 갔더니
상 위에 바나나가 있는 거예요
실물로 보는 첫 바나나
친구가 바나나 껍질을 벗겨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어떻게 까는 줄 몰랐거든요....


공부도 잘했던 장군의 아들은 지금 뭐하는지
그는 모른다






# 적당한 터울로 적당히 숙성된 시를 모아서 여섯 번째 시집을 냈다. 시인보다 학자에 가까울 만큼 삼국유사에 정통하다. 톡특한 시집 제목처럼 고전과 현재를 잘 조합한 시편들이 눈길을 끈다. 아껴가며 읽을 시가 여럿이어서 몇 편은 꼬불쳐 두고 맨 마지막에 실린 시를 골랐다. 딱 들켜버린 내 이야기다. 시인의 사유가 담긴 시인의 말을 옮긴다. 시보다 더 시적인 글이다.


시인의 말 - 멍든 포도로 담근 술의 농도가 더 진할 것이다. 아무렴 그러리라 믿고 살아왔다. 세월이여, 지친 내 술통의 헌 데가 많아, 흘려보낸 붉은 흔적이 서럽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