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소를 모는 노인 - 김유석

마루안 2018. 3. 18. 09:13

 

 

소를 모는 노인 - 김유석

 


외딴집을 감고, 고구마순처럼 뻗친 길섶에
소똥 몇 점이 떨어져 있다.
굳은 몸을 푸는 연한 힘, 그것을 발에 묻히고
걸어간 봄은 냄새가 좋다.

삶은 고구마 같은 등성이,
외딴집에서 거기까지가 노인의 길이다.
평생을 오갔어도 항상 초행인
노인의 마음만큼 밑드는 고구마밭이 있다.

무엇을 앞세운다는 건
그것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큼이나 정겨운 일이다.
따라가는 길도 문득 홀연해질 때
슬그머니 돌아다봐 주는 눈빛,
무엇엔가 등을 맡긴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길들여짐은 없다.

내외하듯, 여물을 먹는 소의 잔등에
담배를 물고 돌아앉은 노인의 허리가 겹친다.
닮은 것들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도
서로의 몸에 마음을 드리우기도 한다.

 

 

*시집, 상처에 대하여, 한국문연

 

 

 

 

 

 

야생화 - 김유석

 

 

꺾지말고 짓밟아다오. 잡초처럼

모질수록 끈끈한 생(生),

밟아주지 않으면

일어서는 법도 모르는 슬픈 속성을

안 보이려고 가려선 입덧난 아낙이

문신 새기듯 모가지 위에 얹는 고통을

꽃이라 부르지 말아다오, 삭은 새끼줄 같은 저 들길

꼬아도 결코 질겨지지 않는 세월에 묶여

빼앗기듯 내미는 씨방 없는 생애들을

빈 들판에 저물도록 세워두지 말아다오.

기다림도 오래면 씨앗과 같거늘

한번 여물어본 적 없는 기억 속에

바람 따라 들불이 질러가면

흔적도 없이 타버리는 한해살이 혹은

뿌리로 길들여가는 땅,

변방에 꽂힌 허물을 눈흘겨다오.

 

 

 

 

# 김유석 시인은 1960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전북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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