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떤 이별 - 안상학

마루안 2018. 3. 18. 09:38



어떤 이별 - 안상학



지역신문 기자가 된 그는 아직 혼자 산다.
결혼식장에 있어야 할 때 민자당사를 점거했고
신혼여행을 가 있어야 할 때 감옥에 있었다.
신부가 청첩장을 만들 때 그는 성명서를 작성했고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꿈꿀 때 그는 수의를 생각했다.
신부가 미리 가진 아이의 얼굴을 생각할 때 그는
새 세상의 신새벽에 동터올 해를 먼저 생각했다.
주례 앞에 있어야 할 때 판사 앞에 선 그를
신부는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떠났다.
그후로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신부는 아들을 혼자서 낳아 길렀고 그는
아이를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하고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했다.
신부는 하 많은 공직 중에 하필 교정직으로 합격하여
교도소에서 근무하며 이리저리 옮겨다녔고
그는 교도소에서 나와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신문 기자가 되었다. 얼마 전,
술에 취해 밤늦게 나를 찾아온 그는, 그녀를
아들 취학문제로 만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단순히 호적 정리 때문에 만났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
아들놈 만나게 해주면 도장 찍겠다고 해도
그녀는 오로지 도장만 요구하더라며 꺽꺽댔다. 그래,
그깟 도장 찍어주지 그랬어, 가슴에 남아 있는
상처의 화인(火印) 수두룩한데 아무 거나 뽑아
꾹꾹 눌러주지 그랬어, 나도 같이 술에 취해 꺽꺽댔다.


한 시대를 사랑한 남자와 그런 남자를 사랑한 여자
그들은 아직도 뿔뿔이 살아가고 있다. 한 남자는
여자와 아이와 시대의 희망을 잃었고, 한 여자는
그런 한 남자를 잃었다. 그들은, 그래, 지금은 혼자서 산다.



*시집, 안동소주, 실천문학사








나는 너는 - 안상학



나는 나비였지만, 이제 나비를 싫어하기로 작정한다. 꽃만 찾아 그 내밀한 꽃샘에 긴 혀를 박고 전율하는 그 집요함도 싫어하기로 한다. 그 지독한 꽃 중독에 걸려 세상 위해 한 번도 노래하지 않은 무관심도 이제 안녕이다. 꽃향기와 꿀물의 단맛에 젖어 나무와 새와 풀과 땅과 하늘을 외면한 편집증도 안녕이다. 나는 그런 나비였다. 이제 긴 애벌레의 잠으로 돌아가 자성의 고치를 튼다. 다시 태어나면 벌이 될 것을 꿈꾼다. 싸울 때 목숨 바칠 줄 알고, 일할 때 땀 흘릴 줄 알고, 사랑할 때 영혼을 다하는


너는 꽃이었지만, 이제 꽃을 싫어하기로 다짐한다. 속 깊은 속이 다 헐도록 나비에게 꿀물 주었지만 아무것도 잉태하지 못한 꽃잎 접기로 한다. 오랫동안 한 나비의 혀를 물고 있던 입술에 힘을 빼고 꽃잎 지기로 한다. 너는 그런 꽃이었다. 씨를 낳지 않아도 다시 꽃 피는 쓸쓸한 나무의 꽃에서 물러나 자성의 겨울잠에 든다. 다시 태어나면 풀꽃이 될 것을 꿈꾼다. 몸은 스러져도 씨를 잉태하고 다시 환생하는


그런 봄이 더디 와도 아주 안 오지는 않을 것이다.



*시집 아배 생각, 애지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에서 오는가 - 박순호  (0) 2018.03.19
어느 죽음에 대하여 - 윤향기  (0) 2018.03.18
우수의 파편 - 이수익  (0) 2018.03.18
소를 모는 노인 - 김유석  (0) 2018.03.18
이별 연습 - 박남원  (0) 2018.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