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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엘레지 - 서규정

황혼의 엘레지 - 서규정 멀리 사라져간 하늘은 불타올라 잿보라로 날리는 마을은 이제 쓸쓸하다 가을, 다치고 다치고 뒤덮인 계절은 늙은 반장님 뒤통수에 나뭇잎으로 붙어서 성질을 버럭 내고 달겨드는 햇살과 싸워 누렇고 질긴 힘줄만 만들어 놓고 간다 이 세상 모르는 것이 없는 바람과 싸워 죽으면 다행이겠다 너무 오래 자란 손톱은 부르르 떠는 허리를 더듬고 가슴을 붙들고 일어서려 한다 한번만 나를 놓아다오 목메이는 겨울산 메아리들을 다 불러 이른 봄날 무수한 나비떼로 날릴 때에 설매화 설움 꽃가지로 나는 나를 찾으리 *시집, 황야의 정거장, 문학세계사 잠깐만의 사랑 - 서규정 짧디 짧은 넥타이를 매고 기웃기웃 날아다니다 월급날은 잠깐잠깐 사랑할 수 있었다 조퇴 한 번이 까진 이번 달 월급은 고장난 신호등처럼 딱..

한줄 詩 2018.03.16

흔들거리는 목소리의 슬픔 - 박석준

흔들거리는 목소리의 슬픔 - 박석준 '살아온 만큼의 아름다움', 예전엔 목소리로 떨구었는데, 요즈음엔 뇌리에 새겨지는 말이다. 생각은 너무도 쉽고 편하지만 말 한마디는 얼른 건네지 않는 20대! 하여 사람들은 늘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40대에 이르면서 돈, 한 사람의 삶의 흐름을 얽어버린, 비의 몸짓이 되게 한다. 돈 없음과 돈 있음, 부족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따라다닌다고 생각했지만, 돈 없는 갈등과 번민은 사람을 구속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있지 못하게 한다, 실존하지 못하게 한다. 회색의 거리가 가끔 사람의 비틀거리는 길을 껴안는다. 실존의 순간들을 실존의 욕망으로 변하게 한 것은 비가 사람 곁에 너무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비는 없다. 그저 잘 흘러가려는 사람이 따로 있을 뿐이다..

한줄 詩 2018.03.16

떠돌이의 기준 - 이용헌

떠돌이의 기준 - 이용헌 ​ ​ 첫째 항성 주위를 끊임없이 공전할 것 둘째 충분한 질량과 중력으로 공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공전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 첫째 여성 주위를 끊임없이 공전할 것 둘째 충분한 물량과 완력으로 창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도전의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 첫째 남성 주위를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할 것 둘째 충분한 아량과 매력으로 하트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응전의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 ​ 첫째 대상의 주위를 끊임없이 배회할 것 둘째 충분한 주량과 체력으로 사람 모양의 형태를 유지할 것 셋째 딴전의 궤도에서 가장 지배적일 것 ​ 나는 별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면서 무한대공을 떠도는 당신을 생각한다 ​ 첫째도 없고 둘째도 없는 시작도 없고 끝도 ..

한줄 詩 2018.03.16

그래서 너는, 그래서 나는 - 홍성식

그래서 너는, 그래서 나는 - 홍성식 가진 것 없이 태어나서 그래서 너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학대와 협잡만을 보고 배우며 자랐다 커 가면서도 똑똑치 못했던 그래서 너는, 선생들의 조롱과 따귀를 독점하며 학교를 저주했다 덜렁 불알 두 쪽 개뿔도 못 가진 그래서 너는, 마흔이 다 되도록 주간지 여배우 비키니에 늙은 정액 튀도록 수음(手淫)이나 했다 머리에 서리는 내리고 힘 빠진 무식한 영감 그래서 너는, 촌구석 국가보조 양로원 골방에서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을 맞았다 대여 받은 웃음으로 누구보다 세련되게 떠벌이며 비생산적인 말장난에 미혹당하였고 예쁜 마누라와 지나치게 똑똑한 아이들을 둔 길거리에서 이쪽을 가리키는 몇몇 손가락 그 거짓 명성에 취해 그래서 나는, 이따위 짓 버리지 못하고 창녀의 간밤 시세..

한줄 詩 2018.03.15

눈물이 비눗방울이 되는 능력 - 이기영

눈물이 비눗방울이 되는 능력 - 이기영 울음을 가진 아름다운 자세는 눈물이라는 고결한 태도에 닿아 있다 눈물이 팽창하는 비애의 방식으로 공중을 천천히 차오르며 출렁거릴 때 울컥, 한 방울로 완성될 때 슬픔이라든가 면역에 대해서는 짧은 호흡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리운 이름은 입 안 가득 고여 입술을 떠나지 못한다 심장 저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첫 번째 고백, 더 단단히 둥글게 말아 올리는 자세를 고집하고 다정한 체온이 건너가지 못하는 슬픔은 저 혼자 깊어져 주저앉기도 한다 눈물이 터지기 직전까지 울음이 아니다 그래서 참는다는 말의 장력은 긴 떨림이다 주저하는 입술 혹은 수백 번의 고민 끝에 발자국 소리 없이도 떨어져 나온 이름들이 공중에서 천천히 가벼워진다 마침내, 눈물은 길게 호명된 이름으로 투명해져서..

한줄 詩 2018.03.15

바다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다 - 강신애

바다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다 - 강신애 ​ 여관 강변장은 성당 같다 입구의 청동 인어상을 나는 마리아라고 부른다 묵주 대신 커다란 소라를 쥔 한 손은 하늘로 뻗치고 한 손은 자신의 음부를 가린 半神半魚의 마리아 헤드라이트 불빛이 터진다, 찔린 듯 경련하는 조각상 비늘이 꽃처럼 떨어진다 녹색의 개가 비늘을 뒤적거리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취객 하나, 난산의 안개가 연인의 긴 그림자를 끌고 강변장으로 스며든다 나직하고 끊길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낸 이 누굴까 이 밤, 조각상 앞으로 내가 해 떨어진 아스팔트 길 위에서 중생대의 숲을 그리워할 때 상처를 따라가듯 아무도 모르게 성호를 그어보일 때 강변장 입구를 뭇시선으로부터 차단한 나무들이 이파리를 동그랗게 모으고 속삭인다 널 환영해, 여기부터 古典이야..

한줄 詩 2018.03.15

명인 - 육근상

명인 - 육근상 손바닥으로 읽는 소리북만큼이나 울림 큰 서적이 또 어디 있으랴 쇠가죽 단단히 동여맨 소리북통 덜렁 메고 수림으로 들어와 관절 굳어버린 사내 북채 쥐고 쓰러져 죽기를 원한다 침엽의 바람 오롯이 받아낸 식솔들이 무거운 저녁 짊어지고 들어와 밥상머리 숟가락 달그락거릴 때 천복 씨 뭉뚝하게 굵은 손가락 펴 소리북통 가죽끈 힘 있게 당겨본다 오늘 무슨 날인가 소리북통마저 바람 새고 천복 씨 문지방 장단 맞추는데 밖에 유성기음반복각판 긁는 듯 바람이 따그락 손장단 읽으며 지나간다 *시집, 절창, 솔출판사 북 - 육근상 까맣게 타들어간 것이 비비면 한 줌도 안 되겠다 퀭한 두 눈에 밟히는 소쿠리며 망태기 바람벽 기대선 지게 작대기 하나에도 눈시울 붉다 작달막하지만 탱자나무 북채 닮아 눈빛 푸르고 걸음..

한줄 詩 2018.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