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헛디딤, 혹은 매혹에 대하여 - 손진은

마루안 2018. 3. 19. 22:42

 

 

헛디딤, 혹은 매혹에 대하여 - 손진은

 

 

같이 가던 아이가 앞쪽 가리키며

손을 잡아 끈다

햇볕에 불 붙은 채로

바람의 장단에 기우뚱거리는 날개를 향해

발꿈칠 들 때 손끝에 모이는 시간

허나 미세한 조각 떨어져나간 날개로

정물이 되어 있는 잠자리

서리에 갇혀 있는 몸속에서도

생명의 형상을 품어 따스해진 죽음처럼

무게 드리우지 않고 죽음으로 걸어간 삶처럼

어쩌면 그 틈새에서

풍요로워진 생명

생이 미망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걸 우린 미망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미망을 찢으며

잠자린 햇살 가운데

날개를 두리우고 있었다

다른 이의 눈길이 빚어낼

빛나는 미망, 헛디딤의 실감을 위해

잠자릴 떼어내려던 손

슬쩍 끌어냈다

 

 

*시집,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문학동네

 

 

 

 

 

 

노인들 - 손진은

 

 

붙들려본 적 있으시죠

새벽녘 인근 공원 같은 곳

풀리는 안개가 몽상을 품는 숲 사이로 난

길이란 길 채운 매끄러운 인간들

셔틀콕이 공기의 음 짚어내고 맨살 허공 미끄러질 때

쏟아지는 그들 웃음 숲속 새들 날리게도 하는 정경

가끔은 그들 틈새에서 걸기적거리는

두툼한 옷 마스크 따윌 거느린

한발 디딜 때마다 얼쑤 그들 팔이 따로 노는

황혼의 몸 새벽에 담그려는 사람들

쏟아지려는 웃음 참기사 어렵지만

힘이 들어가는 손끝도

혼자 감당해내려는 그들 몸의 진지함 앞엔

저만치 붙들려버리지요

끝을 보지 않고서야 저렇듯 깊어질 수가 있을까요

보아요 호송하러 온 검은 그림자 이젠 피부로도 알아보는

저 표정

그들 보행 앞에 얼비치는

한둘씩 저 걸음걸이에서 떨어져나간 사람의 체온도

새벽 산책이 주는 선물 아닌가요

검은 그림잘 위해 순순히 길 비키라고 잘들 말하지만

이젠 기댈 하늘언덕도 쥐뿔도 없다는 듯

수십 년의 생애 한쪽 발끝에 싣고 가는 자의 몸짓 앞엔

그렇지요 잘못 살아온 지난 삶의 죄도 다 떠오르고요

 

그때마다 내

성큼 들어올리는 한발 한발은 보행이 아니라

차라리 춤입디다 물컹 삶의 냄새가 피어오르는 

 

 

 

 

# 손진은 시인은 1959년 경북 안강 출생으로 경북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고 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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