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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재료 - 이병률

사람의 재료 - 이병률 오늘은 약속에 나가 사람들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왜 오지 않는 거냐고 이미 약속 시간으로부터 십 분이 지나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황급히 일어나 간판을 다시금 확인하고 옆 건물로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다시 앉았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만나더라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 좁디좁은 우주에서 우리는 그리 되었다 이 바다의 물을 다 퍼서 다른 바다로 옮기는 일들처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내뱉은 말들이라 가능했다고 믿었다 꽃이 꽃을 꺾는다거나 비가 비를 마시게 된다는 식의 일들 우정의 모든 사랑이라든가 그로 인해 어제는 가볍지 않았다는 기록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이대로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정만으로 이제 감각도 없는 굳..

한줄 詩 2018.03.23

이야기꽃, 그 꽃 - 유기택

이야기꽃, 그 꽃 - 유기택 춘분 전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한 사내가 잘못 내린 버스 정거장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고의가 의심되는 사내의 실종 소식은 곧바로 꽃 세상으로 타전되었고 개화 등고선을 한 뼘 끌어올리고 말았습니다 두손매무리한 생활고에 시달리기만 한 한철 어금니 앙다물고 지낸 겨울의 반란입니다 길을 잃어 본다는 건 금지된 것들에 퍼부어보는 열렬한 항변 이젠 한 뼘 더 높은 데서도 꽃이 피겠습니다 춘분 아침 어디선 꽃 혁명이 불고 있겠습니다 모르긴 해도 찬란한 민란이 어딘가에 있기는 있는 겁니다 *시집, 참 먼 말, 북인 괜찮아 - 유기택 꿈속에서 꿈 이전의 것들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봄 이전의 것들도 안 봄이라 해야 할지 못 봄이라 할지 조금 서운해도 좋겠습니다 시청에서 지정한 현..

한줄 詩 2018.03.23

지는 동백을 보며 - 박승민

지는 동백을 보며 - 박승민 내 생(生)의 미등에 빨간불 켜졌다 손톱을 깎아야겠다 수염을 밀어야겠다 얼어붙었던 하늘에 다시 별자리를 잇고 양떼구름을 풀어 염장이를 수소문해야겠다 아직 발이 나지 않은 뿌리에게 싱싱한 단백질을 선물하리라 한때 연적(戀敵)이었던 그대에게 더 이상 사과를 늦추지는 않으리 한세상 살면서 인간이 차려놓은 밥상이란 늘 한두 가지를 빠뜨려서 간이 맞지 않은 것 입맛을 잃듯 길을 잃어버린 생이었다고는 쓰지 않으리 한 계단쯤은 더 내려가서 강물의 마지막 임종을 오래 지켜보리라 그리고 밤이 오면 아무나 붙잡고 용서를 구하리라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그림자의 중심 - 박승민 앞 바지단추를 열고 전봇대에 자기 물그림자를 구불구불 새겨 넣고 있는 저 사내는 왼쪽으로 쓰러질 듯 쓰러질..

한줄 詩 2018.03.22

각성제 - 이문재

각성제 - 이문재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태풍 한가운데를 지나 남녘 상갓집 다녀오는 길 기억력이 상했는가 자꾸 눈 들어 뒤를 돌아본다 덕수궁 어귀, 길바닥에 짓이겨진 나뭇잎들이 말간 냄새를 피운다 죽는 것들이 흩뿌리는 냄새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들의 향기 언제 가벼웁다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까 덕수궁 잔등, 재개발 지구, 내부수리한 식당에서 가정식 백반을 혼자 먹는다 가정식? 비가정식 백반도 있을까, 식당에만 남아 있는 가정식으로 혼자 점심을 먹는 중년은 서글프다. 이 지방에서 혼자는 자주 죄악이다 깨끗한 옷, 아니 옷 깨끗하게 입고 수염도 좀 깎고 늘 오른쪽으로 기우는 고개도 좀 반듯하게 하고, 목 뒷덜미 자욱한 비듬도 털고, 이 가을의 변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설익은 중년이 꿈꾸었던 것은 별게 ..

한줄 詩 2018.03.22

그리고 고맙다 나머지 내 몸뚱이여 - 신현수

그리고 고맙다 나머지 내 몸뚱이여 - 신현수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만은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내 대장만은 깨끗할 거라는 참으로 헛된 희망은 무엇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내 몸뚱이에 대해 내가 지난 오십여 년 이상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내가 품었던 말도 안 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 망상에 불과한데 내가 평생 내 위에 쏟아 부었던 술 내가 평생 내 폐에 불어넣었던 담배연기 내 대장을 통과했던 기름진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개고기, 오리고기, 양고기, 말고기, 심지어 토끼고기까지 내가 지난 오십여 년 이상 몸뚱이 속으로 밀어 넣었던 온갖 고기들을 생각하면 내 대장만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거의 미친 생각인데 대장의 용종이여 미안하다 높은 감마지티피 간 ..

한줄 詩 2018.03.22

지상에서 가장 치열했던 삶의 기록 - 김응수

지상에서 가장 치열했던 삶의 기록 - 김응수 마흔 고개에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뻐끔대는 물고기같이 살 순 없다고 장맛비에 질질 젖은 구두를 끌며 낙향한 사내가 있었네 희망양록원 마지막이라고 마누라도 피붙이도 버린 놈이 이게 마지막이라고 약쑥이다, 칡넝쿨이다 잡풀을 찾으러 비에 젖은 산비탈을 산록처럼 뛰어다녔네 누군가 장대비 속 꼴을 베는 어둠의 동태를 목격했다네 젖은 구두째 문지방에 나부라진 어둠을 보았다고 하였네 저러다간 큰일 나지, 정말 큰일 나지 좋아했던 소주 한잔 하라는 권유마저 마다하고 여름이 되어 드디어 뿔 자를 때가 되었네 녹혈(鹿血)을 받을 때가 되었네 약초를 탄 물에다 너덧 병 활명수를 섞고 마취총을 쏜 다음 얼추 큰 놈 뒷다리를 묶으려는데 벌떡 일어난 녀석의 발길질에 마흔 고개에 홀로 ..

한줄 詩 2018.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