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된 사진관 - 배용제

마루안 2018. 3. 19. 23:00



오래된 사진관 - 배용제



세상에 잘못 인화된 장면이 나뿐이겠는가
버려진 사진처럼 바람에 떠돌다 내려진
소읍의 정류장 골목에
내 나이만큼 오래된 사진관이 걸려 있다
내부로 들어서자 창에 반사된 흑백사진 속에서
주인인 듯한 노인이 돌아본다
느릿느릿 사진첩을 펼치며 어색한 복고풍의 미소를 짓는다
플래시를 터트리던 나날들,
초점을 맞추지 못해 망쳐버린 때도 많았지만
세월은 전망할 여유도 없어 섬광처럼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빛바랜 시간들이 버려지는 세월 속,
밤은 몇개의 풍경을 보관하고 있는지
날마다 똑같은 태양만 떠올랐다
누추한 기억의 암실,
벌써 이생의 장면을 다 진열해버린 노인은
얼마나 빛나는 날들을 안고 후생으로 건너갈 것인가
또 내 전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런 순간들을 인화하고 있는가
너무 많은 무덤을 짓는 지구의 평면 위,
젊은 그가 늙은 얼굴을 향해 웃음을 짓는
사진첩을 넘기며 나는
내게 남은 장면을 뒤적거린다
이빨을 드러낸 광기의 포즈가
아직은 내 일생의 렌즈른 통해 발광하고 있다
더 이상 방문할 풍경이 없는 노인은
두꺼운 돋보기안경 너머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창밖을 힐끗거린다
희미하게 인화된 추억만 노인의 남은 액자에 끼워진다
세상의 저녁이 창에 걸린다.



*시집, 이 달콤한 감각, 문학과지성








발효된 울음에 대하여 - 배용제



늦은 오후의 공원,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울음이 빠져 나오려고
노인의 어깨를 흔들며 출렁거린다
완전하게 숙성된 술처럼 맑고 진한 것들,
뚜껑처럼 단단했던 이가 삭아버린 틈새로 쏟아지는
울음을 틀어막으려
두 손으로 입술을 움켜쥐며 안간힘을 쓰지만
이미 가슴을 허물며 터져나온 것들이
앙상한 손가락을 비집고 줄줄 흘러내린다
값싸고 독한 술처럼, 그러나
잘 정돈된 공원의 풍경만 잠깐씩 기우뚱거릴 뿐
이렇게 흔해빠진 광경에 지상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쏟아지면 금세 증발해버리고
사소한 흔적도 남지 않는 울음,
어쩌면 저승을 향해
바치는 몇 잔의 祭酒는 아닐는지
지독한 취기에 저녁 하늘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울음은 끝내 멈춰지지 않는다
얼마나 오래 고여왔던 것일까
세상의 온갖 독한 효소들이 스며들어
뼈를 삭히고 생을 삭히며 숙성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과 분노를 밀봉한 채 이를 깨물었던 것일까
서늘한 바탕에 저장된 내용물에 대해
조금 더 고급스런 상표를 찾아 떠돌았지만
결국 싸구려 표정이 창백하게 붙어 있는 얼굴
저 울음을 발효시킨 일생의 용도는 끝났다


비워낼수록 가벼워지는 노인은
이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울음에 몰입한다
몰려온 어둠이 노인을 완전히 감쌀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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