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디에서 오는가 - 박순호

마루안 2018. 3. 19. 21:25

 

 

어디에서 오는가 - 박순호


나도 어쩌지 못하는 야릇한 기운이 몸을 지배하는 날이 있다

관절에 숨겨놓은 달빛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손아귀
광기에 사로잡힌 핏발선 눈동자
고통 같기도 한
통증 같기도 한

어디에서 어디까지
어느 마디에서 어느 마디까지
딱히 집어낼 수 없는 통증

모른 척하기에는 어딘가 찜찜하다
그것은 내 의식과 무관한 보폭을 유지하지만
한 마디도 물을 수 없다
대부분 가장 어둡고 습하고 공허 속에 놓여있을 때
내 어깨를 두드릴 확률이 높다

누구의 가슴을 통해서 내게로 왔는지
어떤 통로를 경유해서 날아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가슴을 파내고 심어놓은
첫 줄처럼


*시집, 승부사, 애지


 




희망도 계급이다 - 박순호


나는 자주 당신의 계급을 잊어버린다
국가에 소속된 희망은
광장의 촛농으로 굳어가고
일 년 내내 몸에서 떠나지 못하는 감기처럼
폭력 앞에 푹푹 빠지는 발
어정쩡한 자세 위로
비눗방울이 날아다닌다
허공의 살 속을 파고든다
쉬임없이 불고 또 불어대는 아이들의 입술은
영롱한 구슬이 되어 공원을 떠다닌다
하지만 당신의 계급은 너무 낡아서
경례를 붙이지 않은지 오래,
그 어떤 위엄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당신은 햇빛에 부서질지 모른다
무게 없는 약속
그런 고통 없는 형식들
희망도 계급이다




# 박순호 시인은 1973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2001년 <문학마을>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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