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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어스름 - 유병근

저녁어스름 - 유병근 발걸음 하나 가고 있다 길이 어떻고 길맛이 어떻고 숭숭 구멍 뚫린 골다공증 같은 숭숭 구멍 뚫린 길바닥 점아 점아 콩점아, 엿가래 같은 콩점아 귀를 감싼 귀머거리 미처 길들지 못한 세상을 적는다 말아 올린 바짓단을 적는다 바짓가랑이를 터는 젖은 발걸음 세상은 여기 아니면 저기도 바람이다 가망 없는 저 구름을 가망 없는 저 너울을 떠미는 저녁어스름은 어둠에게로 간다 어제를 버리고 오늘을 버리고 어제오늘을 등에 진 어스름이 온다 *시집, 꽃도 물빛을 낯가림한다. 작가마을 숨바꼭질 - 유병근 숨을 곳이 없는 시멘트벽에 해바라기가 걸려 있다 꽃 속에 사자 이빨이 보인다 무서운 이빨을 걷어내고 해바라기 꽃 속에 숨을까 아주 먼 곳에서 하필 얼음산이 무너진다는 소식이 있다 무너진 얼음산 어느 ..

한줄 詩 2018.04.05

그 사람 이름은 꽃바람 - 김이하

그 사람 이름은 꽃바람 - 김이하 막 잠들려는 봄밤 열두 시다 방 밖에 트럭 한 대가 서고 모기 나는 소리, 애절한 소리 깜박등처럼 깜박이며 잠을 깨운다 조심성 없이 퉁탕거리는 한밤의 일과 갈 데까지 간 아낙의 악다구니가 뒤섞여 집 밖으로 튀어나오려다 끌려가고 끌려가선 튀어나오고, 악을 쓰고, 흐느끼고 이렇게 활극 한 편이 지나가나 싶은데 다시 조심성 없이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내 기억에도 화석처럼 남은 그림 삼을 삼던 삼톳, 전줏다리 다 망가지고 삼실같이 헝클어진 머리 그 밤사 어둠은 칠흑 같아서 배꼼 내미는 아랫방 불빛에 그림자 춤을 추는 도깨비들, 동구밖 어디에 묶어 둔 그 도깨비들인지 가슴 놀라 잠에서 깬 섬뜩한 밤 '간밤에 불던 바람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따스한 꽃바람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

한줄 詩 2018.04.05

어느덧 아내와도 헤어지는 연습을 - 홍신선

어느덧 아내와도 헤어지는 연습을 - 홍신선 어느덧 아내와도 헤어지는 연습을 한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마음에서 등을 떼면 척추골 사이로 허전히 빠져나가는 애증의 물 잦는 소리. 아내여 병 깊은 아내여 우리에게 지난 시간은 무엇이었는가 혹은 七月 하늘 구름섬에 한눈팔고 혹은 쓰린 상처 입고 서로 식은 혀로 핥아주기 아니다 야윈 등 긁고 이빨로 새치 끊어주기 그렇게 삶의 질퍽이는 갯고랑에서 긴긴 해를 인내하며 키워온 가을 푸른 햇볕 속 담홍의 핵과(核果)들로 매달린 그 지난 시간들은 도대체 이름이 무엇이었는가. 성긴 빗발 뿌리다 마는 어느 두 갈래 외진 길에서 정체 모를 흉한(凶漢)처럼 불쑥 나타날 죽음에게 그대와 내가 겸허하게 수락해야 하는 것 그 이름은 사랑인가 어두운 성운(星雲) 너머 세간 옮긴 삼십 년..

한줄 詩 2018.04.03

잡초를 뽑으며 - 이상원

잡초를 뽑으며 - 이상원 잡초를 뽑는다 알만도 한 나이에 어느 것을 남기고 제거해야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림잡아 뽑는다. 오와 열에 어긋나는 것들, 식량도감이나 화초록에 없는 것은 어쨌든 잡초 어쩌다 에러가 발생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억울하게 뽑혀나가 허연 치부를 드러내고 말라가는 뿌리에게 조금쯤은 미안치만, 내 손이 한 일은 용서된다, 운명일 뿐이므로 망각은 손끝에서 수시로 반짝인다. 애당초 봄은 뉘에게나 봄으로 왔던 것을 분리수거된 시체들이 쌓일수록 오늘 하루 노동의 대가는 뿌듯하고 한껏 버팅기다 끌려나온 뿌리를 힐끔거리며 한 천년 뒤에는 내가 그의 잡초일지도 몰라, 때로 손끝이 파르르 떨리지만 그러나 지금은 우리들의 한 때, 유배된 손을 휘둘러 봄의 한 귀를 처단한다. *시집. 지겨운 집..

한줄 詩 2018.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