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사람 이름은 꽃바람 - 김이하

마루안 2018. 4. 5. 21:26

 

 

그 사람 이름은 꽃바람 - 김이하


막 잠들려는 봄밤 열두 시다
방 밖에 트럭 한 대가 서고
모기 나는 소리, 애절한 소리
깜박등처럼 깜박이며 잠을 깨운다

조심성 없이 퉁탕거리는 한밤의 일과
갈 데까지 간 아낙의 악다구니가 뒤섞여
집 밖으로 튀어나오려다 끌려가고
끌려가선 튀어나오고, 악을 쓰고, 흐느끼고
이렇게 활극 한 편이 지나가나 싶은데

다시 조심성 없이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내 기억에도 화석처럼 남은 그림
삼을 삼던 삼톳, 전줏다리 다 망가지고
삼실같이 헝클어진 머리

그 밤사 어둠은 칠흑 같아서
배꼼 내미는 아랫방 불빛에 그림자 춤을 추는
도깨비들, 동구밖 어디에 묶어 둔 그 도깨비들인지
가슴 놀라 잠에서 깬 섬뜩한 밤

'간밤에 불던 바람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따스한 꽃바람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사람 이름은 꽃바람-

황황히 그 판을 거두어가는 트럭 엔진 소리
모기 나는 소리, 애절한 소리
깜박등처럼 깜박이는 눈을 놔두고
이렇게 활극 한 편이 지나가는데

갑자기 어머니도 아버지도 살아나는 밤
늙은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문을 열고
이승을 내려다보는 밤
봄밤 추위가 으쓱하다, 삵이 튄다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도서출판 도화

 

 

 

 


먼산 꽃구경 - 김이하


봄이 왔다고, 꽃이 핀다고
그런 건 다 늦은 저녁 한때 텔레비전에서나 보는 거지

겨우내 묵은 밭 하루가 다르게 욱어 가는 잡초들
질긴 뿌리 내리기 전에 어서 땅을 갈아엎고
그놈들 꽃 달고 씨 날리기 전에
고추 심고 감자 심을 일 태산인데

봄날이 가기 전에 꽃구경은 무슨 구경
밭가에서 참이나 내어 먹으며 하는
먼산 꽃구경이 더 삼삼하더라마는

봄이 왔다고, 꽃이 핀다고
꽃구경 소식도 감감히 멀어질 때면
풋고추며 감자꽃이 어여쁘게 달리더라마는

그 꽃들 아스라이 져서는 자취 없는 날
우리들 입가에 비로소 벙그는 꽃을 보는 거지
세상도 모르는 꿀맛 이런 거지


 


# 김이하 시인은 1959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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