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 - 하종오

마루안 2018. 4. 3. 21:41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 53 - 하종오



임종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려는
중년의 내가 유언장을 쓰고 있었다
죽은 내가 뒤에서 들여다보며
그 문장을 쓰지 말라는데도
중년의 나는 방금 쓴 그대로 뒀다
죽은 내가 옆에서 들여다보며
다음 문장엔 마침표를 찍으라는데도
중년의 나는 방금 쓴 그대로 뒀다
죽은 내가 앞에서 들여다보며
마지막 문장에 한 문장을 더 보태라는데도
중년의 나는 방금 쓴 그대로 뒀다
말뜻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중년의 나는 죽은 나를 무시하였다
그래도 불시에 닥칠 임종에 대비하여 쓴
유언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면
살아온 대로 죽어가도록 해달라는 정도여서
죽은 나는 중년의 나를 채근하지 않았다
중년의 내가 하룻밤 생각해 보고는
죽은 내가 한 말을 이해했는지
다음날부터 틈틈이 유언장을 고쳐 쓰기 시작하면서
초로를 지나고 말년을 맞이했다
그때까지 유언장은 탈고되지 않았다



*시집,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 도서출판b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 12 - 하종오



나는 언제부턴가 장례식장에 가지 않기로 했다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오는 부고를 받은 뒤
생전에 뵌 적 없는 고인의 영정 앞에서
두 번 절하는 게 어색했다


내가 나이 들어 죽으면
아마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대다수
병사했거나 임종을 앞두어서
문상을 하러 오지 못할 것이다
자식의 지인들이
생전에 뵌 적도 없는 내 영정 앞에서
두 번 절하는 걸 어색해 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도
주변에 부고하지 말고
장사 지낸 후에 알릴 것을
유언으로 써두었다





# 하종오 시인은 환갑이 훨씬 지난 나이에도 왕성하게 시를 쓴다. 그동안 서른 권이 넘는 시집을 냈다. 이런 창작열이라면 시인의 생애에서 50권의 시집도 가능하겠다. 시집 제목에 확 꽂혔다. 같은 제목의 시가 일련 번호를 달고 55번까지 실렸다. 특별한 배열 순서는 아니고 창작 순이란다. 이런 시가 가슴에 착 감겨오는 걸 보면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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