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착한 사람 - 최금진

마루안 2018. 4. 4. 22:07



착한 사람 - 최금진



나는 착한 사람, 앞으로도 목적 없이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종착점 같은 것은 없다
도피 중인 사람들은 나를 대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고
권위적인 사람들은 내가 의자로 보일 것이다
대화와 소통은 미개한 짓, 나를 도구로 사용한 흔적이
당신의 손에 돌도끼처럼 들려 있지 않은가
한때 시간을 주머니에 넣어 다닌 적도 있었지만
누굴 헤치려는 게 아니었다, 몰래 버리기 위해서였다
투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담배도 피우지 않을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흉보고, 욕하고, 비난하면서
변명과 복수들을 차곡차곡 지폐처럼 모아
배를 한 척 사고, 진화의 역방향으로 배를 몰고 가겠다
주말엔 텔레비젼을 보고, 될수록 잠을 많이 자고
제발 나를 내버려 두라고, 그런 요구조차 안 하고
이불 속에서, 늙은 쥐처럼 눈 오는 창밖을 멀뚱히 훔쳐보고
책도 한줄 읽지 않고, 무식하게, 형편없이, 무기력하게
학술회에서, 강연회에서, 술자리에서 몰래 빠져나온 사람처럼
늙어갈 것이다, 어떤 참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날 사랑한다면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도둑질도 하지 않을 것이고, 카드빚도 갚지 않을 것이다
미친놈, 샌님, 또라이, 비관주의자, 암사내, 집짐승, 퇴보, 퇴보
당신들이 날 두려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모른 체 눈을 감고 있을 테니까
나는 끝내 당신들의 살의를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



*시집,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창비
 







폭탄먼지벌레 - 최금진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지
어디 한번 덤벼보라는 얘기지
그깟 논리나 법 조항 갖고는 말하지 말자는 거지
학벌로, 돈으로, 백으로 말하는 놈들이 있으니까
씨도 안 먹히는 말로 깐죽거리는 놈들이 있으니까
폭탄으로, 식칼로, 주먹으로 깡으로
모든 간섭과 월권으로부터 나를 지키겠다는 거지
엘리트 민주주의자, 강남좌파, 리무진 리버럴
오케이, 해볼 테면 해보라는 거지
네가 터지든 내가 터지든 한번 해보자는 거지
조용하며 예의 바른 웃음, 살뜰한 표준어
다 먼지로 만들어줄 테니까
뜨거운 속을 바깥으로 까뒤집으며
나는 반정부군, 나는 동학당, 나는 폭탄과 먼지의 벌레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지
올 테면 와보라는 거지





# 최금진 시인은 1970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2001년 창비 신인시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이 있다. 오장환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