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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에 부쳐 - 김추인

감나무에 부쳐 - 김추인 칠순도 몇 번은 지났을 늙은 둥치 꼬부라지고 휜 등 뒤로 옹이 박힌 세월이 머물러 있다 손가락 사이 주르르 새어나가던 물 같던 모래 같던 꽃각시의 놓쳐 버린 시간들이 이 가을, 발갛게 돌아와 서리하늘 높다랗게 들어올리며 어머니- 어머니- 고향 마당이 시끄럽다 큰 놈 작은 놈 잘난 것 못난 것 무지렁이들까지 각질의 비늘 쓰고 앉은 어미의 검은 둥치에 잔가지를 대고 배꼽을 붙이고 떫고 꽉꽉한 속내까지 익히나 보다 발 아래 수북이 벗은 옷이 쌓이고 맨살의 어머니는 떠나갈 종자들에게 마지막 젖을 물리고 있다 *시집, 벽으로부터의 외출, 도서출판 둥지 어떤 외출 - 김추인 이승이란 곳이 가까워 오는지 몇번인가 왔을 바깥이 시끄럽다 어차피 꿈일 터이지만 이런 꿈은 안 꾸는 것이 낫지만 단청..

한줄 詩 2018.03.29

감자 먹는 봄날

고흐의 모든 그림을 좋아하지만 이 그림을 가장 좋아한다. 볼수록 좋다. 어두워서 더 좋다. 영화 을 보면 늙은 아버지와 딸이 나온다. 매일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황량한 풍경이 흑백으로 그려진 영화다. 나는 왜 그림도 그렇고 영화도 이런 영화가 좋을까. 거기서 딸은 매일 요리를 하는데 삶은 감자다. 감자 삶는 것도 요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뜨거운 물에서 건진 뜨거운 감자를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밖은 거친 눈보가가 몰아치고 말은 마구간에서 거친 숨을 쉰다. 바람에 창문과 문짝이 삐그덕거리고 식탁에 마주 앉은 아버지와 딸은 조용히 삶은 감자를 먹는다. 오직 소금에 찍은 감자밖에 없는 식탁이 왜 그렇게 거룩해 보이던지,,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종일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

열줄 哀 2018.03.29

내가 아직 내가 아니었을 때 - 정소슬

내가 아직 내가 아니었을 때 - 정소슬 -좌우 내가 아직 내가 아니었을 때 너였을 수도 있었을 때 대부분 하등동물이 등과 배가 달라 색깔 구분이 확연하여 뒤집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의 정체 금세 탄로 나 먹이가 되기 십상인 먹힐 땐 등과 배를 구분하지 않는 위아래 구분도 않는 좌우 구분은 더더욱 않는 너였을 수도 있었을 내가 기꺼이 내가 되었다는 건 반쪽의 너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을까 *시집, 사타구니가 가렵다, 도서출판 푸른고래 어제 내린 꽃비 - 정소슬 어제 내린 꽃비 한나절 덩싯덩싯 꽃춤 추어대더니 땅속으로 다 스며들고 강물에 다 떠내려가고 진창에 고인 물로만 희붉게 남았습니다 어제 그 꽃비의 흔적은 오로지 저 진창뿐입니다 저 진창만이 어제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영화를 증거해야 할 진창엔 어느..

한줄 詩 2018.03.27

망둥이가 살아 있다 - 이봉환

망둥이가 살아 있다 - 이봉환 압해도 송공항 선착장에서 육지 사내 셋이 반짝이는 바다가 제 것인 양 낚시줄을 휙휙 끌어당긴다 그때마다 쏙쏙 바다는 몸을 빼내버리는데 사내들 줄곧 팽팽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때! 배고픈 한 마리 덥석 미끼를 물어 냅다 잡아챈다 에라, 이, 망둥이 새끼잖아 이빨로 줄을 툭 끊은 육지 사내 목구멍에 걸린 낚싯바늘도 안 빼주고 무거운 봉돌까지 매단 놈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산 채 바다 깊이 수장돼버린 망둥이 새끼 뻘바닥에 처박혀 어린 눈을 끔벅일까 발버둥 칠까 하루 이틀 하고도 십 년이 흘렀는데, 그 새끼들 어찌됐을까 제 힘으로는 벗어날 도리가 없는 줄을 붙들고 펄펄 살아 날뛰던 계만이형의 어린 새끼들 동네 빈집 골방에 박혀 며칠을 끙끙대다가 비소 덩어리 삼켜버린 아래뜸 ..

한줄 詩 2018.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