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를 뽑으며 - 이상원
잡초를 뽑는다 알만도 한 나이에
어느 것을 남기고 제거해야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림잡아 뽑는다.
오와 열에 어긋나는 것들, 식량도감이나
화초록에 없는 것은 어쨌든 잡초
어쩌다 에러가 발생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억울하게 뽑혀나가
허연 치부를 드러내고 말라가는 뿌리에게
조금쯤은 미안치만, 내 손이 한 일은
용서된다, 운명일 뿐이므로
망각은 손끝에서 수시로 반짝인다.
애당초 봄은 뉘에게나 봄으로 왔던 것을
분리수거된 시체들이 쌓일수록 오늘 하루
노동의 대가는 뿌듯하고
한껏 버팅기다 끌려나온 뿌리를 힐끔거리며
한 천년 뒤에는 내가 그의 잡초일지도
몰라, 때로 손끝이 파르르 떨리지만
그러나 지금은 우리들의 한 때,
유배된 손을 휘둘러 봄의 한 귀를 처단한다.
*시집. 지겨운 집, 도서출판 고요아침
가을밤에 - 이상원
모두 배반하고 돌아간 주막
술잔들이 쟁그렁거리며 서로가
건재한 것인가를 여담으로 묻고 있다. 조명
흐릿한 창 너머 길이 하나 다가와 아무래도
신발들이 바뀌었다고 합세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떠나지 않았는데 가을밤은
아무도 만날 수가 없다. 넉넉한 잠 속으로
떠나간 집들의 소문을 먼 데 별이 전하고
길은 제 몸을 뒤적이는 바람의 체온을
수긍하기 시작한다. 낯선 꽃비로 분사되는
가등 빛의 적막한 잔해 속으로 들어가
가랑잎처럼 말들이 푸석대는
골목길을 걸으며, 어째서
오래 전의 물소리도 그리움이 되는가를
생각한다 생각은 깜깜한 변두리 숲 속으로
저 혼자 날아가 하루살이처럼 죽는다
-가을밤은 아무런 일도 없이 늦게사 온다.
# 이상원 시인은 1953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199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와 <문학과의식>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지상의 한 점 풀잎>, <낙토를 꿈꾸며>, <지겨운 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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