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는 - 이성목

마루안 2018. 4. 4. 22:29



그는 - 이성목



누구였을까, 방문을 열면
재빨리 담벼락에 몸을 숨기는 구렛나룻 푸른 길
날마다 긴 옷자락을 끌고 지나가던 산그림자 같은 그는
누구였을까, 방문을 걸면
문고리 한 번 들었다 놓을 때마다 창호지 문살마다
갈래갈래 퍼져 들어오는, 그는
맨발로 돌 밟는 소리를 내며 돌아온 저녁
마주앉아 찬밥을 먹고 산으로 간, 그는
낡은 사진 속에서 보았을까, 갈중이를 입고
산처럼 서 있었을까, 그때 머리띠를 풀고
붉은 자귀나무 종일 무수천으로
머리카락 흩뿌리던 속에서 잠시 보았을까.
제주 방언이 광활 바다 같은 목청으로
출렁거리던 그 속에서 보았을까.
민오름 잡풀처럼 반백의 머리 풀어헤치고
토굴 속에 숨겨 둔 나라를 꺼내 보는
그는 누구였을까, 손목에 낀 때처럼
잡을 때마다 생살로 벗겨져 나오는, 그는
4월 3일 生, 혹은 4월 3일 死,



*시집, 뜨거운 뿌리, 문학의전당








도원결의 - 이성목



나는 여기서
더 오래 나를 기다려야 한다
죽은 울타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봄을 맞이하듯
두엄 냄새 그윽한 편지를 보냈지만,
개울을 따라 내려간 소식은 어느 차사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봄 날 하루
산죽은 바람에 칼을 벼리고,
한 생을 탕진하고 돌아온
나는 사지를 꺾어 꽃잎 한 장에 나를 건다.
햇살에 손목을 그어 내미는
복숭아나무 가지에 입을 대면
목젖에 닿는 이 뜨거움이 당신 아니던가.
탱자나무 울타리에 턱을 괴고
혓바닥까지 스며드는 가시 같은
내 사랑은 거듭 거듭 덧나야 한다.
상처 물컹하게 짓무르도록
몸에 마음이 차고 넘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