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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만남, 긴 기다림

한때는 내년 봄에 피는 꽃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색다르다. 더디게 온다는 생각과 함께 지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도 다르게 느낀다. 저 꽃 작년에도 피었는데,, 봄이면 늘 가던 곳에서 다시 핀 꽃을 보면 내 삶이 더욱 소중해 보인다. 바람만 살짝 불어도 꽃이 진다. 꽃 지는 중에 봄소풍을 나온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소리가 더욱 싱스럽다. 노란 병아리들이 이럴까.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아이들은 병아리처럼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한 무리 노인들이 보인다. 저들은 작년에도 왔을 게 분명하다. 지는 꽃을 보며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소풍 - 조찬용 아이들이 성벽 길을 줄지어 소풍을 간다 두 노인네 느티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며 아이들을 바라..

다섯 景 2018.04.12

봄, 싫다 - 이규리

봄, 싫다 - 이규리 백골 단청, 하얀 절 한 채 지금 막 무너지고 있다 그걸 받아 안는 한낮 무너져도 소리가 없다 저걸 누가 고요라 했겠다 언제 왔다 갔는지 만개한 벚나무 아래 신발 한 켤레 봄마다 땅속으로 마약을 주사하는지 이맘때, 거품 물고 사지를 틀다 몸서리 잦아드는 마흔 노총각이 있지 깜빡 까무러진 대낮이 있지 백약이 무효한 청춘 덤불처럼 걷어내고 이내 어깨를 허문 잠, 누가 고요라 했겠다 더 이상 속지 말자 해놓고 속는 게 꽃 탓이라 하겠나 약 탓이라 하겠나 너무 가까워서 안 보이는 것도 있지 취하게 하는 건 향이 아니라 취하고 싶은 제 뜻일 텐데 그래, 나무가 언제 꽃 피웠나? *시집, 뒷모습, 랜덤하우스 날개, 무겁다 - 이규리 어젯밤, 창에 날개를 부딪고 죽은 나비 휴지로 곱게 싸놓았는데..

한줄 詩 2018.04.11

남산 도서관의 봄

예전에 열여덟 살 무렵에 남산 도서관을 처음 갔다. 책을 읽기보다 입시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일찍 독립해야 했기에 알바를 하면서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공부를 하다 도서관이 닫힌 후 늦은 밤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남대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 길을 오르고 내릴 때면 남산의 은행나무 길이 계절마다 바뀌는 것을 봤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용산 시가지의 환한 빌딩 숲 사이로 내가 편히 머물 공간 하나 없다는 것이 서럽기도 했다. 그때는 독서실에 먹고 잤다. 근처 식당에서 하루 식권 두 장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잘 때는 공간이 너무 좁아서 의자를 책상 위로 올려 놓고 책상 밑으로 발을 뻗고 잤다. 모든 것에 목말라 있던 때라 수음을 자주 했다. 봄꽃이 환하게..

열줄 哀 2018.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