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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에 와서 - 김태완

객지에 와서 - 김태완 중림동 사람들은 가슴에 상처를 입어 고통이 뭔지 알고 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중림동이 고향이 아니다 서울의 중심지 서울역이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중림동은 유난히 허허로운 얼굴로 배고프게 들어선 입간판들로 천자만별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새 사람이 와도 반가움이 없는 멋적은 타향 중림동 사람들은 늘 언제 떠날까를 잊지 않는다 고통스러우면 언제고 기차표를 끊는다 벌써 10년째 함바집을 하는 청양집 아줌마 지지리도 못생긴 채로 암팡지게 설거지하는 팔뚝 너머로 묻는다 "언제까지 있을 거유?" *시집, 추억 속의 겨울은 춥지 않다, 오늘의문학사 돈을 세면서 - 김태완 돈을 세면서 남의 돈을 세면서 세종대왕이 훌륭한 분이라는 걸 분명히 깨달았지 돈을 세면서 생선 비린내가 나면 ..

한줄 詩 2018.05.14

모란시장 강아지들의 외출

성남 모란시장을 갔다. 딱히 뭐를 사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외출 삼아 간 것이다. 다른 곳에 없는 것이라면 몰라도 과일, 채소는 우리 동네보다 비싸다. 어쨌든 시장에 오면 활기가 넘쳐 저절로 생기가 돈다. 시장이야말로 사람 사는 풍경의 가장 기초적인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선거철 되면 출마자들이 시장에 나와 상인도 만나고 어묵도 먹고 하는 모양이다. 언제가부터 전통 시장은 거의 안 가게 된다. 예전에 내가 사는 신촌에도 전통시장이 있었다. 시장도 없어지고 강화 버스 터미널도 사라지고 캬바레도 없어졌다. 모란 시장은 다른 곳에 없는 동물 시장이 있다. 닭, 오리는 물론이고 토끼, 개, 고양이도 판다. 상자 안에 막 젖을 뗀 강아지들이 꼬물거리고 있다. 그 중 호기심이 아주 많은 강아지가 자꾸 밖으로 ..

다섯 景 2018.05.14

햇빛의 구멍 - 김점용

햇빛의 구멍 - 김점용 그가 왔다 오래전에 죽은 그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타던 낡은 자동차를 물려받아 여수로 설악으로 안면도로 멀리서 나를 빙빙 돌기만 할 뿐 수십 번을 불러도 오지 않던 그가 젊은 모습 그대로 나를 찾아왔다 오른손엔 붉은 펜을 왼손엔 황금빛 놋 열쇠를 쥐고 왔다 그는 생전과 달리 부끄럼을 많이 타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미안하다는 뜻인지 고맙다는 뜻인지 웃음의 햇살만큼 나는 어두워지고 붉은 펜을 받아 그의 옷에 내 이름을 적어넣었다 놋 열쇠는 받지 않았다 그는 곧 돌아가야 할 사람 그러나 한번은 뜨겁게 안아주어야 할 사람 두 팔 벌려 힘껏 껴안으니 갑자기 늙어 바스러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살 그의 뼈가 내 몸으로 다 흘러온 듯 백발 성성한 햇살 그림자가 조그만 열쇠 구멍이 되어..

한줄 詩 2018.05.14

어떤 개인 날 - 서규정

어떤 개인 날 - 서규정 이슬비는 낯선 땅 아무 데나 발붙이고 산다 저녁을 찾아 나선 아침이 돌아오지 못하는 한낮에 꽃밭 위에 뛰어내리는 소낙비와 만나서 강을 이루고 그렇게 시끌버끌 흘러가서는 무엇에 부딪쳐 넘어졌는지 검정 고무신을 신은 발목들이 뱃고동을 울리며 둥둥 떠 있고 침을 삼키면 목에 가시로 걸린 낮달이 쉽게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비늘이 제일로 비싼 세상을 노동자로 살다가 혀끝을 차는 소리 때문에 무너진 한평생의 계급을 위하여 산꼭대기에도 천막집에도 비들이 새 들어오는 이유를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물고기가 찾아나선 강물이 투망에 걸려 돌아오지 않는 세월을 직업을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 옷은 작업복이라 강은 빨래터를 만나면 제법 깨끗해지겠지만 사람의 숲으로 끼어 들어간 나 하나의 하염없음이..

한줄 詩 2018.05.14

너무 오래 - 이서린

너무 오래 - 이서린 이서린 매일 아침 108배 엎드렸다 일어나며 유심히 바라본 늦가을 마당 그 마당 한쪽에 벚나무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고 있는데 때로는 가볍게 혹은 무겁게 몸서리치는 저 숱한 입술과 입술 하루 한순간 108번 흔들리다 한 며칠 지독한 떨림에도 견디더니 어느 날 몇 번 엎드리다 일어나니 비어가는 가지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람 없는 날에도 미련 없이 지는데 어찌 다 알겠는가 나뭇잎 하나 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몸부림이 있는지 작은 숨 하나 멈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신음 삼켜야 하는지 영영 가는 길이 쉬운 일이겠는가 가는 이나 보내는 이나 이토록 오래 서성이는 것을 *시집, 저녁의 내부, 서정시학 사라진 봄에 대하여 - 이서린 기차가 떠났다. 결핵 3기 분홍빛 얼굴 봄날을 가르며 제..

한줄 詩 2018.05.14

노인과 그 가문 - 심은섭

노인과 그 가문 - 심은섭 태백시 장성광업소 맞은편 태백중앙병원 611호 진폐증 환자실 한 노인이 사타구니 쪽으로 고개를 구겨놓고 누워 있다 그 병상 옆에 노인을 빼 닮은 쉰 살 넘긴 노총각도 새우등을 한 채 누워 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병상과 병상 사이에 모여 앉아 지상에서 마지막 눈물로 죽음의 층계를 닦고 있다 낡은 엔진소리가 세습된 노총각은 노인이 걸어온 날들을 떠올렸다 빈 도시락에 캄캄한 어둠을 채워 퇴근하던 날 이빨 빠진 사기술잔 입에 물고 낡은 유행가를 부르며 허공에 꿈을 묻어버리던 일 기침소리 골방 가득해도 빈 지갑의 주름을 펴려는 손바닥의 굳은살은 박달나무보다 단단했다 갱도 275km 속에서 수천 년을 침묵하던 검은 돌의 어깨를 곡괭이로 내리찍던 노인의 숨소리는 초침이 돌아갈수록 공터에 버..

한줄 詩 2018.05.14

추억 속의 들꽃 한 송이 - 정윤천

추억 속의 들꽃 한 송이 - 정윤천 쑥물만치나 쓰던 날들 속에 일 늦은 아부지 야윈 몫시밥 끝내 훔쳐묵고 말았던 한저녁에 저런 오살 새끼 사람 노릇 당초에 애시부텀 그른 자식..... 마른 목청으로 엄니는 꺽꺽 목이 메이고 말고 등짝 가득 새끼줄처럼 감겨오던 싸대기 몇 찌검을 그래도 견뎌보다가 종내 쫓겨나왔던 사립문 화들짝 밀치면 거기 허기보다 더 높게 뜨고 그보담 더욱 쓰라렸던 눈매 칼칼한 달빛 한 자락 휘영청 동네 끝으로 내쳤던 밤길..... 순간에 살오름 돋던 한기로 으시시 떨려오던 부황든 밤부엉이 소리 어두컴컴한 두어 소절 그런 밤이면 우리 아부지 맹물로 멀건하게 불린 허허벌판의 잠결에 뒤채어 잠 못 이루시던 시린 잠결 너머로 지지리도 더디 왔었던 어느 봄날 어귀 내 무참한 기억 속에 꼭 그 자리..

한줄 詩 2018.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