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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 박숙자

저자의 이름이 숙자에다가 삼중당 문고 세대의 독서문화사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어서 저자의 나이가 많은 줄 알았다. 저자의 다른 책인 에 나온 프로필을 보니 1970년에 태어났다. 이 책에는 저자의 출생년을 뺀 걸 보면 누구든 나이를 먹으면 밝히고 싶지 않은 게 늘어나는가 보다. 난데없이 저자의 나이를 들먹이냐면 이 책의 내용이 해방 이후 한국전쟁 무렵부터이기 때문이다. 언급하는 도서들로 봐서는 최소한 1940년대에는 태어났을 법한데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자신감 있는 글발로 그 삭막한 시대의 독서사를 설파하고 있다. 이 책의 장르를 꼭 분류하자면 문화사를 다룬 역사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읽은 책들을 나열하면서 그 시대의 사회 단면을 세세히 기록했다. 전하는 방식도 독특하다. 책에 나오는 인물을 등장시켜..

네줄 冊 2018.05.16

열한 살의 추억

초등학교 4학년, 당시는 국민학교라 했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육성회비라는 것을 내야했다. 어머니는 월사금이라 불렀다. 일종의 수업료였다. 월 160원으로 기억한다. 매월 돈을 낼 때마다 담임이 그 칸에 도장을 찍어줬다. 한 반에 학생은 60 명 남짓이었다. 나는 2학기가 되도록 달랑 한 칸에 도장이 찍힐 때가 많았다. 아침에 담임 선생의 일성은 육성회비를 제때 내는 거라 했다. 며칠 후 육성회비 안 낸 사람을 불러냈다. 첫 날은 스무 명 넘게 불려나온다. 손바닥을 몇 대씩 맞고 넘어간다. 이튿날은 열댓 명으로 줄어든다. 사나흘 후에 딱 두 사람이 불렸다. 그 중에 하나가 나다. 담임은 약속한 날까지 육성회비를 내지 않았다고 벌을 내렸다. 수업 시간에 복도에 나가 의자를 들고 서 있는 벌이다. 한 시..

열줄 哀 2018.05.15

무지개 - 김유석

무지개 - 김유석 점점 사소한 것들이 길을 앞서는군요. 기억 속으로 배웅했던 것들마저 덥석덥석 뒷덜미를 잡아채고 두근거림으로 끝나버리곤 하는 마음의 허공 물기어린 당신의 눈빛조차 자꾸 희미해져 가는군요. 당신의 아름다운 복선, 집 떠나던 송아지의 눈망울로부터 다시 허공에 쓰여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꿈들이 읽혀졌는가. 소년을 세우던 언덕은 가을소나기에 쫓기는 중년의 등 뒤로 거미줄을 늘어놓고 방아깨비 같은 소년의 영혼을 기다리는데 당신은 허구, 멀리서 바라봐야만 선명한 물기둥 먹구름을 뜯으며 우는 늙은 소의 웃음소리만 들려올 뿐 이젠 당신이 내게로 오세요. 건너지 못하는 골짜기에 걸터앉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추억해줘요. 물방울의 몸을 빌어 들어 올린 나의 바닥을 저녁햇살로 천천히 ..

한줄 詩 2018.05.15

아버지의 귀 거래사 - 천수호

아버지의 귀 거래사 - 천수호 아버지는 귀를 먼저 지우셨다 기억과 거래하는 족족 귀는 몸에서 떨어져나와 기웃기웃 날아서 반백 년을 도로 넘어갔다, 가버렸다 사라진 귀들, 고흐의 귀가 그랬고 윤두서의 귀가 그랬다 귀만 먼저 날아 먼 세기로 넘어가버렸다 귓바퀴만 남아 헛바퀴를 돌릴 동안 귀가 없어진 아버지의 눈은 까무룩해졌다 아버지는 중년의 딸도 잊고 두런두런 탄식이 풍덩, 수련으로 피어오르는 연못만 바라본다 수련과 연꽃이 구분도 없이 흐드러진 아버지의 동공을 흔들어보지만 좀처럼 오십 년은 돌아오지 않고 아버지는 지루한 하품을 한다 덩달아 후두를 활짝 여는 수련잎 연못의 푸른 동공이 휘둥그레진다 연못은 아무래도 저 눈을 먼저 지울 모양이다 *시집, 우울은 허밍, 문학동네 심심 심중에 금잔디 - 천수호 아버지..

한줄 詩 2018.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