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당시는 국민학교라 했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육성회비라는 것을 내야했다. 어머니는 월사금이라 불렀다. 일종의 수업료였다. 월 160원으로 기억한다. 매월 돈을 낼 때마다 담임이 그 칸에 도장을 찍어줬다. 한 반에 학생은 60 명 남짓이었다.
나는 2학기가 되도록 달랑 한 칸에 도장이 찍힐 때가 많았다. 아침에 담임 선생의 일성은 육성회비를 제때 내는 거라 했다. 며칠 후 육성회비 안 낸 사람을 불러냈다. 첫 날은 스무 명 넘게 불려나온다. 손바닥을 몇 대씩 맞고 넘어간다.
이튿날은 열댓 명으로 줄어든다. 사나흘 후에 딱 두 사람이 불렸다. 그 중에 하나가 나다. 담임은 약속한 날까지 육성회비를 내지 않았다고 벌을 내렸다. 수업 시간에 복도에 나가 의자를 들고 서 있는 벌이다. 한 시간 벌을 서고 다짐을 받았다. 내일까지 육성회비 안 낼 거면 학교에 오지 말란다.
밭에 일 나가는 어머니 앞에서 떼를 쓰며 울었다. 어머니는 나중에 준다는 말만 하면서 학교 가기를 종용했다. 열한 살 아이가 퉁퉁 부은 눈으로 교실에 들어서는 공포를 아는가. 오늘도 첫 시간은 복도에서 의자를 들고 서 있어야겠지.
의자 들고 서 있으면 팔도 아팠지만 더욱 싫은 것은 친구들 보는 앞에서 가난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 그때는 그것이 도망 가고 싶은 정도로 부끄러웠던지,, 육성회비 내 놓으라고 떼를 쓰며 우는 아이를 달래던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
미안하다는 말을 말하지 못했다. 당신이 멀리 가시기 전에,, 나는 어머니의 살을 뜯어 먹고 산 거미였다.
'열줄 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돋보기에 대한 명상 (0) | 2018.06.20 |
---|---|
쓸쓸하고 머나먼, 고향은 없다 (0) | 2018.06.11 |
데이비드 구달 박사의 존엄사 (0) | 2018.05.14 |
비밀번호 기억하기 (0) | 2018.04.17 |
남산 도서관의 봄 (0) | 2018.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