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 안성덕

마루안 2018. 5. 16. 22:05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 안성덕



소리골 속에 숨어 있는 다른 소리를
지울 수가 없다
겉보기엔 멀쩡한데
닦고 또 닦아봐도 자꾸만 긁힌다


지문이 찍히도록 붙잡은 흔적이다
제 가슴팍 쥐어뜯은 기억이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유독 지직거린다
우연찮게 손에 넣은 중고 레코드판이
두어 소절씩 건너뛴다 말을 잃은 듯
헛돌며 몇 번이고 더듬거린다
사랑은 더듬거리고 건너뛰어야 제격이라는 듯


오랫동안 뽕짝뽕짝 아렸을
그 누군가의 심사가 문득 안타까운 봄밤
내 마음의 트랙에도
지워지지 않은 스크래치가 깊어
복사꽃을 핑계로 지직거린다


불 꺼진 그녀의 창이 바라보이던 가로등 밑
담배꽁초 눌러 끄며
하염없이 서성거린 내 발자국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스크래치처럼
지직지직 남아 있을 그 발자국
자꾸 눈에 밟힌다



*안성덕 시집, 몸붓, 시인동네








오늘도 걷는다마는 - 안성덕



어디로 흘러가겠다는 건지
나그네가 따로 없다
타관 땅 밟아 떠돈 지 십 년 너머 반평생
길은 한사코 거꾸러뜨리려 기를 쓰고
밀려드는 길 떠밀리지 않으려
한 발 두 발 서둘러 내려놓는다


옆 사내를 훔쳐보며
채근했었다 그렇게 걸어온 것이다
러닝머신 무한궤도
등줄기가 촉촉하다
해찰 한 번 못하고 뚜벅뚜벅
쳇바퀴 돈다
떨려나지 않으려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듯
끝없는 길 흔적 없는 발자국 위에
인감도장 눌러 찍듯 발자국을 찍는다
언뜻 비치는 헬스클럽 창밖 낯익은 거리가
이국보다 차갑다


걸음을 멈추면
젖은 등골은 또 얼마나 서늘할까





# 두 시의 공통점은 읽으면서 문득 뽕짝 선율이 귓가에 아롱거린다는 거다.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시가 나이 들면서 조금씩 다르게 읽힌다. 새벽녘의 텐트 높이도 점점 낮아지고 오줌발까지 힘이 빠지니 중년에게 뽕짝은 더욱 애달프게 들리지 않겠는가. 아직 늙기에는 좀 애매한 나이지만 말이다. 시가 있어 조금 위안이 되는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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