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 박숙자

마루안 2018. 5. 16. 22:16

 

 

 

저자의 이름이 숙자에다가 삼중당 문고 세대의 독서문화사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어서 저자의 나이가 많은 줄 알았다. 저자의 다른 책인 <속물 교양의 탄생>에 나온 프로필을 보니 1970년에 태어났다. 이 책에는 저자의 출생년을 뺀 걸 보면 누구든 나이를 먹으면 밝히고 싶지 않은 게 늘어나는가 보다.

난데없이 저자의 나이를 들먹이냐면 이 책의 내용이 해방 이후 한국전쟁 무렵부터이기 때문이다. 언급하는 도서들로 봐서는 최소한 1940년대에는 태어났을 법한데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자신감 있는 글발로 그 삭막한 시대의 독서사를 설파하고 있다.

이 책의 장르를 꼭 분류하자면 문화사를 다룬 역사책이다. 저자는 자신이 읽은 책들을 나열하면서 그 시대의 사회 단면을 세세히 기록했다. 전하는 방식도 독특하다. 책에 나오는 인물을 등장시켜 저자를 대신해 그 시대를 구술하는 방식이다.

내가 많은 책을 읽은 편이 아니지만 이 책에서 다룬 도서들은 읽은 책이 많아선지 그런대로 따라갈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지 못한 아쉬움이 늘 컴플렉스 비슷한 것으로 남아 있기에 이런 책은 대리 만족하기에 좋았다.

밥을 안 먹으면 죽지만 책은 안 읽어도 죽지 않는다. 책 속에 길이 있다 했지만 울 엄니는 그런 길 모르고 평생을 살았다. 저자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 좋은 문화적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나는 책보다 굶는 게 더 두려운 아이였다. 그렇다고 저자와 나이 차가 많은 것도 아니다.

아무리 유유상종이라지만 어릴 적 내 주변은 왜 그렇게 삭막했는지 모른다. 술 주정하는 아버지 피해 도망다니고 밥상을 엎거나 어머니 때리는 아버지를 보며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다행히(?) 그런 아이들과 달리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었다.

정비석부터 전태일까지 저자의 글발은 쉼없이 독자를 흥미롭게 만든다. 세계문학전집을 열심히 읽고 삼중당 문고를 섭렵한 방대한 독서량과 끊임 없는 호기심이 이런 책을 낳게 했을 것이다. 거기다 저자는 할머니나 외할머니가 오래 살았음이 분명하다.

문화가 아름답고 화려한 것만은 아니듯 인생사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구질구질한 인생 속에 살아내는 참 맛이 있지 않을까. 그 맛을 어느 정도 알기에 다소 어두운 내용인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낼 수 있었다.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글이 대세인 요즘이기에 더욱 소중한 책이다. 텁텁하지만 맛있는 책이다.